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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Jan 14. 2023

중3 담임과 실존주의

마을 도서관에 와서 써보는 오늘의 일기



중학교 3학년 첫날 조회 시간이었다. 반이 모두 갈려서 같은 반 아이들의 얼굴은 낯설고 담임선생도 처음 보는 인물이었다. 새 학기를 맞아 교장 선생에게 경례를 하고(그때는 거수경례를 했다. 우리가 "충성!"라고 외치면 교장이 오른손을 눈썹 밑까지 올려 경례를 받는 장면은 언제나 어색해서 웃음이 나왔다) 훈화 말씀을 들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니 공부를 열심히 하라거나 교칙을 잘 지키라는 둥 별 내용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조회가 끝나기 전에 교감 선생이 나와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교감은 언제나 끝날 때쯤 나타나 결혼식 피로연 장소를 설명하는 친척 아저씨처럼 다급하고 건조하게 말했다.

"오늘 각 반의 주번은 집으로 곧장 가지 말고......" 교감이 숨이 찬지 잠깐 멈추고 침을 삼켰다.

"집으로 곧장 가지 말고......" 나는 갑자기 농담을 내뱉고 싶어졌다.

""화장실에 들렀다 가라." 내가 나지막이 던진 말에 아이들이 쿡쿡 웃기 시작했다. 가랑잎 굴러가는 것만 봐도 웃음이 나온다던 중학교 시절이었다.

그런데 운이 없었다. 마침 새로 배정된 담임이 지나가다가 그걸 들은 것이었다. 권무남 선생이었다. 지금은 돌아가셨을 것이다. 선생은 나에게 와서 모자를 벗기고 왼 뺨을 잡고 오른쪽 뺨을 치기 시작했다. 끼고 있던 장갑까지 벗고 세 대를 쳤다. 아이들은 킬킬거리고 웃으며 자신에게 오지 않은 불운을 즐겼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뺨을 치나. 중학생이면 교감 선생 멘트를 이어서 장난도 좀 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담임은 나와 생각이 달랐던 것 같다. 나는 학교 생활이 꼬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담임은 그때 일을 잊은 것 같았다. 그 후로 일 년 내내 그것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걸 생각하면 더 어이가 없다. 나는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맞은 것이다. 아무런 이유도 없는 건 실존주의와 깊은 관계가 있다.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 것 같지만 그건 나중에 짜 맞춘 이야기이고 사실 우리는 모두 우연히 태어난 것이다. 오 마이 갓. 아, 나는 기독교나 천주교 신자가 아니니까 이런 감탄사를 쓰면 안 되는데. 그렇다고 부처님이나 알라를 찾을 일도 아니다. 오, 부처님. 이거 너무 어색하다. 중학교 조회 시간에서 시작해 너무 멀리 왔다. 도서관에 왔으니 책을 읽어야지. 여기는 아리랑도서관이다. 나는 도서관 컴퓨터로 나의 책을 검색한 뒤 약간 안심을 하고는 책상에 와서 이런 유치한 글을 쓰고 있다. 다행히 내가 이러는 걸 아무도 모르고 있다. 내 앞에 앉은 여학생은 그래프가 가득한 문제집을 30분째 풀고 있다. 앞에 있는 남자가 이런 글을 쓰며 놀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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