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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19. 2023

소설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진실도 있다

조성기 소설 『1980년 5월 24일』리뷰

스티븐 킹의 『11/22/63』은 케네디가 암살된 날짜를 소설 제목으로 쓰고 있는데 조성기의 신작 『1980년 5월 24일』도 비슷하다. 소설 제목으로 쓰인 이 날짜는 박정희의 시해범 김재규가 사형당한 날이다.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10.26 사태'를 복기할 때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김재규가 대통령을 시해한 진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여러 번 재현된 궁정동 안가 대행사 현장에서는 '차지철의 안하무인적 언행에 김재규가 격분해서 순간적으로 저지른'이라고 되어 있으나 단순히 감정이 욱해서 단행한 일이라고 보기엔 너무 계획적이었고 쿠데타 시도라고 보기엔 권력 찬탈 의지나 배후가 전혀 없었던, 아주 이상한 사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건의 힌트를 박근형의 연극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에서 얻으려 한다. 그 연극엔 수많은 군인들이 등장하는데 심지어 제대를 며칠 앞두고 총을 든 채 부대를 이탈한 병장 얘기도 나온다. 며칠만 기다리면 전역을 할 수 있는 말년 병장이 굳이 탈영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사람의 복잡한 심사를 '제대를 앞둔 병사가 총기를 들고 탈영했다고 사살당했다'라는 한 줄의 기사로 설명할 수 있을까. 박근형 작가는 그럴 수 없다 생각했기에 그 군인의 사연을 맥락이 있는 연극의 대사로 풀어놓았던 것인데, 이는 소설가 조성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건조한 수사 일지나 역사적 기록만으로는 그날의 진실을 꿰뚫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아예 김재규 일인칭 시점으로 들어가 앉아 모든 정황을 다시 살피기로 한 것이다.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문영심 작가의 책(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김재규 평전)이 있었으나 못 읽었고, 지난해 많이 팔렸던 『남산의 부장들』과 그 책을 원작으로 한 이병헌 주연의 영화도 있었지만 핵심적인 의문에 있어서는 미진함이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김재규 일인칭으로 진행되는 소설이라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김재규의 내면까지 입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1960년대 대한민국을 말하면서 박정희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만큼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인물도 없다. 대통령 박정희는 남로당의 고위 간부로 활동하다가 우익으로 전격 전향했고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권력욕의 화신 같은 인물이다.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 등으로 나라 경제를 발전시킨 공도 있으나 10월 유신으로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반공을 국시로 삼은 뒤에는 민청학련·인혁당 사건 등을 통해 죄 없는 사람들을 학살, 영구 집권을 꾀한 죄가 더 크다. 그는 특히 권모술수와 용병술에 능했다. 그의 교활한 술수에 부하들은 대립각을 세운 채 충성 경쟁을 벌이다가 차례대로 버림받았다. 김종필과 김성곤, 이후락과 김형욱, 박종규와 윤필용, 김재규와 차지절까지 단 한 번도 그 비극적인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소설 『하얼빈』에서 김훈은 "이토를 어떡하든 눌러야 한다는 생각, 이토를 죽이는 건 '목적이 살(殺)에 있지 않고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것에 있다'는 생각"이라며 안중근에게 대의명분을 주는데 이는 부마사태와 코리아 게이트 등으로 엉망이 된 정국에서도 판단력을 상실한 채 여자를 끼고 놀던 박정희를 막으려면 그를 죽이는 수밖에 없다는 김재규의 입장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 뒤에 전두환이라는 악마가 등장해 우리는 더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겪게 되지만 그는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데에 일단 성공한 것이다. 공교롭게 10월 26일은 김재규가 박정희를 쏜 날임과 동시에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날짜이기도 하다.  


소설 『1980년 5월 24일』은 김재규가 잠에서 깨어나 사형을 당하기까지 단 하루 동안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 안엔 일제 강점기부터 제5공화국 출범까지 격동의 세월은 물론 이승만, 박정희, 장준하, 박동선, 김지하, 서승·서준식 형제에 이르는 난세의 인물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이런 현대사를 소설로 쓴다는 것은 소설가에겐 엄청난 모험이 이닐 수 없다. 이미 40여 년의 시간이 흘렀다지만 당시의 상황을 각자의 성향대로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고 당장 유신헌법을 기초한 김기춘이 불과 얼마 전 박근혜의 비서실장을 했으니 지긋지긋한 역사는 아직도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모든 것은 다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첫 장을 첫 장을 읽은 뒤 바로 노트를 펴 주요 인물들을 꼼꼼히 메모하며 읽을 수밖에 없었다. 읽으면서 "팩트, 팩트!"라는 단어를 얼마나 외쳤는지 모른다. 조성기는 이 소설을 쓰기 위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료를 뒤지고 다른 이들의 책을 읽었을까. 김형욱이나 박동선, 문명자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 '코리아 게이트'는 물론 은밀하게 숨겨져 있는 요정 마담 장정이에 이르기까지 그가 밝혀내고 발굴한 팩트들은 독자 앞이나 역사 앞에서도 당당하게 느껴진다. 이런 견지에서 내가 가장 감탄한 대목은 국선 변호인 안동일이 '시저를 암살한 부루투스처럼'이라고 하자 "부루투스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시저를 암살했을 때 부루투스가 두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계신지요?"라는 대사를 김재규에게 주었다는 점이다. "부루투스 너마저!"라는 클리셰는 셰익스피어가 희곡으로 발명한 것인데 이에 대해 뒤늦게 아는 척하며 이의를 제기할 독자를 막고자 이런 부연 설명까지 등장인물에게 맡긴 작가의 철두철미함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설을 읽다가 조성기 작가의 페이스북에 들어가 그가  2016년  숭실대를 정년퇴임 할 때 학생·졸업생 대표로 김멜라 소설가가 했던 송사를 재밌게 들었다. 나에게는 서울대 법대를 나와 『라하트 하헤렙』이라는 문제적 소설을 쓴 깐깐한 작가로만 여겨졌던 이 선비가 알고 보니 학생들에게 뭐든 강요하는 일이 없이 대등한 대화를 나누는 스승이었고 답사 때에는 멀미하는 학생의 정수리에 수지침을 놓아주고, 개그 코드가 발동하면 무리하게 공중부양까지 시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 소탈한 면까지 있는 사람이 이렇게 흥미진진한 소설을 썼다는 게 쉽게 믿어지지 않을 뿐이다.


『달과 6펜스』의 작가 서미싯 몸은 '작가는 판단하기보다는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그 말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 바로 조성기가 아닌가 싶다. 그는 픽션의 형식으로 전달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과 진실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들려주는 데 성공했다. 그것도 아주 재미있고 소설적으로 뛰어나게. 역사적 진실에 목마른 사람은 물론 오랜만에 선 굵은 내러티브를 경험하고 싶은 분들께도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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