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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Sep 09. 2023

여보게, 연애도 예술도 잘 되지 않는 게 정상이라네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리뷰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창조해 낸 로미오와 줄리엣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져 곧장 죽음까지 함께 하지만 이건 사랑에 대한 환상이다. 인간 세상에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생겨난 건 불과 이백 년도 안 되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고 안톤 체호프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1896년에 쓴 희곡 《갈매기》의 남녀들은 모두 어긋난 사랑의 일인자들이다. 니나는 꼬스짜를 사랑하지만 곧 꼬스짜의 어머니 아르까지나의 애인인 작가  뜨리고린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이를 보고 눈에 불이 켜진 왕년의 인기 여배우 아르까지나는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다시 빼앗아 옴으로써 니나를 만신창이로 만든다. 한편 꼬스짜를 사랑하던 마샤는 짝사랑에 지쳐 학교 선생 메드베젠코와 결혼하지만 그를 증오한다. 남편 대신 마을 의사 도른을 평생 사랑하며 애를 태우는  마샤의 어머니 뽈리나는 또 어떤가.

어긋나는 연애에 실망한 인간이 또 하나 의지할 곳은 예술인데 이는 천재의 영역이라 성취감보다는 욕심과 질투, 아쉬움으로 점철되기 십상이다. 체호프의 《갈매기》는 배우와 극작가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어느 하나 깔끔하게 성공하는 사람이 없다는 면에서는 비극이요 그러면서도 치사하고 어이없는 인간상이 난무한다는 측면에서는 희극이다. 초연에서 극본을 이해하지 못한 배우들 때문에 관객들에게 처절하게 외면당했던 체호프는 눈  밝은 극장주 겸 연출가에 의해 재발견됨으로써 세계적인 희곡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어제 본 연극 '갈매기'는 노련한 연출가와 스태프들에 의해 몇 년째 계속되는 안정된 공연이었으나 소품 컨셉이나 캐스팅이 아쉬웠다. 극 중 마흔세 살로 되어 있는 아르까지나 역을 맡기엔 남권아 배우의 나이가 너무 많았고 우아함도 모자랐다. 꼬스짜 역의 김은우 배우도 마찬가지다. 관리인의 무전기와 꼬스짜의 일렉트로닉 기타가 등장하고 일꾼들의 여행용 캐리어도 최신품이라 극의 시간성이 모호하게 되었는데 크게 작용하지는 않는 것이어서 그 의도조차 모호하게 되어버렸다. 그나마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것 같은 니나 역의 박희정 배우와 마샤 역의 박하영 배우의 활약이 빛을 발했다.   물론 이건 나의 사견일 뿐이니 극을 흥미롭게 본 관객들은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아무튼 꼬스짜가 끝내 자살에 성공하는 마지막 장면까지 보고 나면 우리는 얻는 것은 어떤 긍정적인 교훈이나 메시지보다는 "여보게, 친구. 인간 세상에서는 연애도 예술도 잘 되지 않는 게 정상이라네."라며 쓰게 웃는 체호프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그런데 이게 또 매력적이라 여기에 동조하는 후배들의 행렬이 줄줄이 이어진다. 몇사람만 떠올려 볼까. 구로사와 아키라, 필립 로스, 코엔 형제, 커트 코베인...... 아, 연상호도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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