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만 나오고 권총은 안 나오는 초단편 소설
아버지는 눈을 떴다. 그리고 방금 꾸었던 생생한 꿈에 대해 생각했다. 이건 틀림없는 계시였다. 방금 전 꿈에 신이 그의 거실 TV 옆에 앉아 그에게 뭐든 한 가지 소원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이유는 그가 전생에 어떤 사람을 구해줬는데 그가 하필 신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기억도 나지 않는 전생의 선행 덕분에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게 된 그는 얼떨떨했다. 뭔가 속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때 보답을 할 것이지 왜 이제 와서 이러느냐고 물었더니 그땐 신이 좀 바빴다고 했다(역시 인간이 신의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뭘 주겠다는 신과 싸우기도 그렇고 해서 그는 그냥 고맙다고 하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가족회의를 소집했다. 백 일간 신에게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이에 감복한 신이 드디어 어젯밤 꿈에 나타나 뭐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노라 했다고 말했더니 가족들의 얼굴이 이상해졌다. “아빠. 그냥 개꿈이야.” 딸이 심드렁하게 말하자 엄마가 딸의 손을 잡았다. “아니다. 딸아. 어차피 개꿈이라도 한 번 빌어는 봐야지. 안 돼도 손해는 아니잖니. 내 꿈은…”
“안 돼!”
“엄마, 잠깐!”
“여보, 스톱!”
일제히 식구들이 엄마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을 막고 손을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잘 믿기진 않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어이없이 엉뚱한 소원을 빌어 기회를 날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0.1초 만에 세 사람의 머릿속에 똑같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회는 딱 한 번밖에 없으니 신중하기로 했다. 딸이 아이패드를 가져와 스마트 TV에 연결한 뒤 제외해야 할 소원을 정리했다. 세계 평화나 제3세계 민주화, 원자력 발전소 사고 원상복구 같은 허황된 생각은 안 하기로 했다. 일단 공익을 생각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실질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소원이어야 이루어질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결국 돈이었다. 액수를 얼마로 정하느냐가 문제였다.
필요한 돈의 액수를 상상하는 건 즐거운 일이었다.
“백지 수표를 눈앞에 두고 고민하던 여배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요?” 아들이 이렇게 말하자 엄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꼭 이런 데다 여배우 같은 성 차별적 단어를 갖다 붙여야겠니?”
“자, 자. 집중하자. 지금 농담할 때가 아냐.”
아버지가 다시 세 사람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들은 돈이 생기면 회사를 그만둘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 이제 발 뻗고 잘 수 있게 됐네. 김 부장 이 새끼 배 아파서 어쩌냐." 큰아들이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를 거론하며 웃었다.
"야, 걔한테 사표 집어던지면서 일 년짜리 해외여행 간다고 해. 괜찮아." 아버지도 신이 나서 말했다.
"그동안 너 고생했지 뭐. 적성에 안 맞는 일 하느라고. 휴일에도 계속 출근하고..." 엄마도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다. 모처럼 가족 분위기가 화목해졌다. ‘돈이 대리미야, 대리미’라고 하던 봉준호 영화의 대사처럼 인생의 주름살이 한순간에 쫘악 펴지는 느낌이었다.
"오죽하면 제가 일요일에 한 번만 푹 쉬어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겠어요." 아들이 껄껄껄 웃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스피커폰으로 건조한 여성의 음성이 들려왔다. "소원이 접수되었습니다."
아.
눈앞이 하얘지고 천장이 내려앉았다. 피가 거꾸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가족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외쳤다.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어!
"아주 잘했어, 오빠. 이번 주 일요일엔 출근 안 해도 되겠네." 딸의 시니컬한 반응에 아버지는 격분했다. 딸에게 격분한 게 아니라 신에게 화가 난 것이었다. 도대체 왜 소원을 빌 기회를 한 번밖에 안 주는 것인가. 인간은 원래 자신이 뭘 원하는지 잘 모르는 존재라는 걸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신은 어쩌자고 이러는가. 왜 이렇게 경솔한가.
아버지는 일단 눈앞에 있는 TV를 넘어뜨렸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한 행동이었다. 그리고 거실에서 빨래 건조대로 쓰고 있던 러닝머신도 밀어 넘어뜨렸다. 또 뭘 밀어 넘어뜨려야 하는지 찾고 있는 그를 가족들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엔 그가 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극도의 스트레스가 그를 잠들게 했으리라.
딸이 119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저희 아빠가 소원을 빌다가 쓰러지셨는데요.”
엄마가 스마트폰을 빼앗았다.
“여보세요. 남편이 쓰러졌어요. 동해시 동굴로 198 제일아파트 102동 203호로 빨리 와주세요. “
아버지는 앰뷸런스를 타고 가다가 다시 신을 만났다. 신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내가 경솔했네.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는 게 아닌데. 인간을 과대평가했어.”
신은 기운이 빠져 누워 있는 아버지에게 소원의 옵션과 메커니즘에 대해 설명했다. 소원을 더 들어주겠다, 그러나 돈의 액수를 적어낸다고 바로 생기는 건 아니다, 너무 큰돈이 바로 생기면 바로 가정이 망가진다, 아내는 바람이 나고 아들은 살인을 저지를 것이다, 그래도 좋은가.
아버지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천천히 주세요.
아버지는 신이 내민 소원수리 서류에 천억 원을 써넣었다. 바로 생기는 게 아니라 그가 죽기 전까지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앞으로 사업을 해서 이 돈을 만질 수 있는데 그게 언제인지는 불명확하며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을 가족들에게 말하는 순간 효력 정지다.
“이건 뭐 내가 그냥 열심히 해도 되는 얘기잖아? 굳이 신이 안 도와줘도.” 그가 중얼거렸다. 구라쟁이 같은 신에게 또 속은 기분이 들었다. 그나저나 이걸 가족은 물론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니 그는 답답해 죽을 것만 같았다. ‘기왕 쓰는 거 1조를 써넣을 걸 그랬나?’ 그는 또 돈의 액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