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그리고 봄』
윤석열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 이재명 후보를 몇 포인트 차이로 이겼는지 기억하는가. 겨우 0.73%였다. 하지만 대선은 '승자 독식' 체제이므로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경제·문화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대선의 여파는 정치판은 물론 기자 출신의 은퇴자 정희 가족의 삶까지 뒤흔들었다. 이제 아들 딸 다 키웠고 출근할 필요도 없으니 프로렌스 퓨 주연의 영화 《더 원더》나 《레이디 맥베스》 같은 OTT 상영작 추천해 주는 친구가 최고라고 중얼거리던 정희는 TV에서 50억 클럽으로 이름 높은 곽상도가 무죄 판결을 받은 뉴스를 보고 뒤집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딸은 부모의 결혼기념일 식사 자리에서 자신에게 튀르키에 출신 레즈비언 애인이 있음을 밝히고 음악을 하겠다며 가출해 고시원으로 들어간 아들은 어느 날 함께 저녁을 먹던 남편이 정치적 입장 차이로 화를 내다 스마트폰을 얼굴을 향해 던지는 바람에 "씨발"이라 외치고는 발을 끊고.......조선희 작가의 신작 소설 『그리고 봄』은 대선 이후 우리가 처한 현실을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정치인은 물론 신세계 정용진, 페친 강미숙 씨 김형민 씨 등이 모조리 실명으로 등장하는 초 리얼 세태 소설이다.
나는 엄마 정희와 그녀의 아들 딸인 하민이와 동민이 얘기도 흥미롭고 공감 포인트가 많았지만 이 집의 남편이자 아빠인 영한이 책장을 정리하는 장면에 오래 눈길이 머물렀다. 대학생 때 야학을 하다가 남산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감방에 간 뒤 억울하게 군대까지 다녀와야 했던 불운한 사나이 영한은 인기 없는 사회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모멸감을 느끼며 은퇴한 지식인이다. 그는 '언젠가는 아이들이 읽을 것'이라는 기대로 모아 왔던 책들이 무용지물이 되자(요즘 책 읽는 사람이 어딨어요) 과감하게 처분하기로 마음먹는데 사실 그게 쉽지 않다는 건 여러분도 다 아시지 않나. 이문열의 모든 작품을 박스에 넣다가 그래도 한때 '이런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구나'라는 감탄을 선사해 주었던 『황제를 위하여』를 다시 챙긴다거나 박완서 선생이 『한 말씀만 하소서』를 쓸 때가 자신과 같은 나이였음을 상기하는 부분 등은 독서가나 장서가 들의 심정을 꿰뚫는 조선희의 헤아림이다. 그는 (소설엔 책 제목이 나오지 않지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읽으며 자신과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나태함을 동일시하다가 새 책을 쓰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브라질의 대선을 다룬 영화 《민주주의의 위기》부터 독일, 일본, 아프가니스탄 등의 정치 역사와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는 신공을 부린다. 어려운 책 말고 자신의 아들 동민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그가 책 제목을 고민하다가 '눈떠보니 후진국'이라는 제목을 떠올리고 '어어, 이건 남의 책 베낀 티가 너무 난다'라고 하는 대목에서는 현웃음이 터진다. 조선희 작가의 남편 박태웅 작가가 작년에 쓴 베스트셀러 '눈떠보니 선진국'의 패러디임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진짜 조선희 작가의 삶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리얼함이 넘치는 데다가 에피소드 사이사이 통찰 넘치는 명문장들이 섞여 있다. 예를 들어 동민이 인디 음악을 할 때는 ''인디밴드 시작해서 장기하처럼 될 가능성은 일만 분의 일'이라고 하다가 음악 때려치우고 면접 보러 다닐 때는 '스타트업이 대기업 되는 건 정자가 사람 될 확률'이라고 하는 식이다. '가방끈은 길어지는데 사람들은 상스러워지고'라는 영한의 탄식도 잊을 수 없다. 또 좌파 소설이 한 편 나왔네,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조선희 작가 말마따나 우리나라에 좌파가 존재하기나 하나? 그럼 누가 이 소설을 읽어야 하냐. 대한민국에서 씨가 마른 좌파나 아직도 문재인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말고, 민주당이나 이재명이 싫어서 할 수 없이 윤석열을 찍긴 했는데 그 이후 나라 돌아가는 상황이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나를 포함한) 대다수의 국민들이 읽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면 누가 옳고 누가 가짜인지 훤히 보이지만 당대에는 그렇지 못하고 혼란스럽기만 하니 눈 밝고 머리 맑은 작가가 쓴 소설이나 영화·연극이 필요하다. 이 소설엔 윤석열을 싫어하는 사람도 나오지만 심상정을 찍은 사람, 종북세력이 아직도 있다고 믿는 사람도 다 나오니까 안심하시라. 게다가 가족 소설이라 애틋하고 훈훈한 재미도 있다. 짧은 데다 문장이 좋아 단숨에 읽힌다는 장점도 있다. 그러니 어서 서점에 가서 조선희의 그리고 봄 주세요,라고 외치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