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거의 [라일락과 깃발]
우리나라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 100권만 뽑으라고 하면 절대 빠지지 않을 작품 중 하나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닐까 한다.’난·쏘·공'이라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렸던 이 소설은 당시 농촌 사회가 붕괴되면서 도시 빈민촌으로 밀려 들어갔던 이주민들에 대한 이야기인데, 비참한 노동 현실을 다루면서도 문학성 또한 뛰어나 당시 대학생들의 필독서로 꼽혔다. 나는 중학교 때 집에 굴러다니던 이 책을(세로 쓰기 본이었다) 뒤적뒤적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처음 '메비우스의 띠'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굴뚝청소를 하고 나와 얼굴에 검댕이가 묻은 A와 B 중 누가 세수를 할 것 같은가?'라는 대학교수의 관념적 유희가 돋보이는 퀴즈 등은 지금도 신선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존 버거의 소설 [라일락과 깃발]을 읽으면서 이 소설 생각이 많이 났다.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트로이'라는 가상의 도시에서 살아가는 쥬자와 수크스라는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다. 라일락과 깃발은 이 두 사람의 별명이다. 1970년대 중반, 존 버거는 알프스 산골 마을로 들어갔다. 맨부커상에 빛나는 작가적 명성을 뒤로하고 농민들 곁으로 간 그는 이후 십오 년 동안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소외된 자들의 삶을 주제로 글쓰기에 매달렸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살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등장인물들의 사투를 보고 있노라면 요즘 틈나는 대로 읽고 있는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생각이 나기도 하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유령 같은 할머니 화자에서는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가 생각나기도 했다. 존 버거의 문장은 사실과 환상을 자유자재로 오간다. 처음 디마 아저씨를 면회 갔던 쥬자가 교도소 담장 밖에서 커피를 팔고 있던 수크스를 만나 '애인을 면회하고 나오는 중'이라고 거짓말을 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호감을 표시하는 장면은 너무 사랑스럽고 쥐 언덕에 있는 쥬자의 집 마당에서 수크스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도 정말 좋다. 수크스가 공사장에서 일할 때 크레인 기사 야니스의 작업을 한 페이지에 걸쳐 아주 상세히 묘사하는 부분은 작가적 성실성이 빛나는 문장들이다.
아내가 산 책을 내가 가로채서 먼저 읽었다. 이 책은 삼부작 소설 ‘그들의 노동에(Into Their Labours)’의 세 번째 결과물이다. 1974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1990년에 완성했단다. 1부 [끈질긴 땅(Pig Earth)]과 2부 [한때 유로파에서(Once in Europa)]도 사서 읽어야겠다. 존 버거의 작품 13권을 번역한 김현우 EBS PD는 '번역은 책을 누구보다 꼼꼼히 읽는 작업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멋진 번역자 덕분에 나도 이런 작품을 읽는 기쁨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