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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May 03. 2020

한성대입구역에서 만난 ‘박 대리’의 딸

길에서 만난 술 취한 여학생 도와준 이야기


지리산 제철요리학교에 다녀오는 아내를 마중하러 한성대입구역으로 나갔다. 배가 고프다는 아내를 데리고 '임흥수의 자연밥상'이라는 식당에 들어가 우렁된장정식에 참이슬 한 병을 마셨는데 밖으로 나온 아내가 택시 타고 가면 안 되냐고 해서 오랜만에 택시를 잡아 타기로 했다. 그런데 전철역 앞 택시 잡는 곳에 어떤 젊은 여성이 먼저 앉아 토하고 있었다. 스무 살을 겨우 넘겼을까,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데 차도엔 토한 자국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아내와 나는 그녀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너무 취해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친구가 오기로 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걸리냐니까 삼십 분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냥 가기엔 너무 걱정이 되어 아내가 계속 말을 시켰다. 뒤에 과일 좌판을 깔고 있는 아저씨가 "택시에 토했는지 택시 운전사가 토한 값 내놓으라고 하도 윽박질러서 오만 원을 입금했더니 입금 확인하고 거기 버리고 갔다'라고 목격담을 들려주었다. 우리는 참으로 야멸찬 택시기사라고 욕을 했다. 아마 젊은 여성이라 아저씨가 손을 대지 못하고 그냥 바라보기만 한 것 같다. 섣불리 도우려다가 성추행 구설수에 휘말릴 수도 있으니까. 아내가 젊은 여성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동대문이라고 대답을 하는 데 그렇게 믿음이 가진 않았다. 조금 있다가 스마트폰에 대고 "엄마"라고 하길래 아내가 보니 '박 대리'라고 쓰여 있었다. 아내가 "엄마 아니고 박 대린데?"라고 물었더니 "엄마예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딸은 스마트폰에 엄마 이름을 박 대리라고 저장해 놨구나. 아내가 전화기를 빼앗아 "따님이 좀 취했는데, 여기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앞이에요. 오실 때까지 제가 있을 테니까 천천히 오세요."라고 말했다. 엄마가 대학로에 있다고 하니 금방 올 것 같았다.


여성의 토사물이 머리카락에도 묻어 있었다. 아내가 가방에서 여행용 휴지를 꺼내 입과 머리카락을 닦아주고 있는데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 쪽에 택시가 한 대 섰다. 허둥지둥 내리는 여성을 보니 엄마가 맞는 것 같았다. 얼마나 급했는지 삼선 슬리퍼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다. 내가 "여기요, 여기!"라고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더니 "내가 미쳐, 미쳐!"라고 고개를 흔들며 달려왔다. 아줌마 뒤로 택시가 따라왔다.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하며 딸을 택시에 태웠다. 아내는 "너무 야단치지 마세요. 지금 무슨 얘기 해도 기억 못 해요."라고 아주머니에게 말했고 나는 "이거 가져가세요."라며 여행용 휴지 뭉치를 전해줬다. 아내는 덕분에 술이 다 깼으니 걸어가자고 하며 가방을 내게 던졌다. 술 취한 스무 살 여학생의 모습이 짠하면서도 귀여웠다. 나도 저렇게 술 억장으로 취해 돌아다닌 적 많았는데. 엄마를 박 대리라고 부르는 거 보니 더럽게 말 안 듣는 딸인 것 같다. 하긴 그 나이에 엄마 말 잘 들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잘 들어갔으니 됐다. 여보, 오지랖 그만 부리고 우리 앞가림이나 잘하자. 내일은 월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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