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편성준 Mar 14. 2021

잊었던 대하소설의 맛을 다시 살려주는 책

조선희의 『세 여자』

1990년대에 결혼한 신혼부부 집에는 소설 『태백산맥』이 두 질 있는 경우가 꽤 많았다고 한다. 처녀 총각일 때 각자 읽던 책을 한 서재에 모아 놓으니 그렇게 된다는 것이었다. 1980~9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였다. 박경리의 『토지』를 비롯해 이병주의 『지리산』 황석영의 『장길산』 조정래의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등 격동의 우리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을 읽는 재미는 각별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해서 이제는 그렇게 긴 소설은 읽는 사람도 없고 쓰는 작가도 드물어졌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으로 빼앗기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책을 읽을 시간이 짧아지자 당연히 책의 두께도 얇아졌다. 소위 '벽돌 책'이라 불리는 두꺼운 인문학 책도 소수의 학자나 애호가들 사이에서만 유통되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집어 든 조선희의 『세 여자』 는 단 두 권만으로도 잊혔던 대하소설의 맛을 되살려주는 반가운 작품이었다.


책을 다 읽은 뒤 표지에 인쇄되어 있는 세 여자의 사진을 다시 쳐다봤다. 단발을 하고 청계천에 찍은 한 장의 사진에서 출발한 소설 『세 여자』는 이 앳된 스무 살 여성들이 한국사 한복판에서 어떤 인생을 살아갔는지 추적했고 그 결과 한반도와 상해, 뉴욕, 모스크바, 태항산, 평양 등을 종횡무진하며 고결했던 조선 공산당의 시작부터 몰락까지를 보여주는 광활한 역사 드라마가 완성되었다. 소설은 주세죽 허정숙 고명자 세 주인공뿐 아니라 그들의 남편이자 연인이었던 박헌영 임원근 김단야를 등장시키고 나아가 김구 안창호 여운형 이동휘 등 역사 속 거물들을 불러들인다. 그뿐이 아니다. 여고보 때 수예 시간에 선생님에게 특별히 허락을 얻어 톨스토이 소설을 읽었다는 허정숙의 말을 통해 그때도 유별나고 용감한 청년들은 뭐가 달라도 달랐음을 보여주고, 동아일보 있을 때 신춘문예라는 아이디어를 처음 낸 홍명희 국장(『임꺽정』의 그 작가)을 가리켜 '동서고금의 모든 시 소설을 읽었다는 소문도 과장이 아닌 듯했다'라고 묘사하는 문장은 그 당시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는 디테일들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많은 자료들을 섭렵했고 그걸 다시 소설 속에 녹이기 위해 애썼는지 저절로 느껴진다. 예를 들어 1920년대 상해에 모여 있던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작가의 균형감각은 정말 감탄스럽다. 개인적으로는 김구에 대한 냉정한 평가에서 충격을 받았다. 아울러 특정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나 존경은 위험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음은 물론이다.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지는 사회주의가 당시엔 얼마나 새롭고 핫한 사상이었는지는 '밥은 이밥, 산은 금강산, 주의는 사회주의'라는 신종 속담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당시 인사들이 나누었을 법한 소설 속 대화들은 치밀한 정세 판단과 팩트 취재가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사상과 이상을 좇으면서도 푸르른 청년들이기에 어쩔 수 없이 피어나는 로맨스들도 사랑스럽다. 역사소설임에도 뒷담화, 절친, 프로토콜, 쇼케이스 등 요즘 쓰는 언어들이 작가의 입을 통해 거침없이 등장하는 것은 독자들이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역사소설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었을 것이다.


2021년 1월 말 마루에 앉아 1925년 경성에서 활약하던 젊은 공산주의자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내가 그런 격랑 속에 빠진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는 그때의 풍운아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나는 노트를 펴놓고 등장인물들의 이름을 메모해 가면서 책을 읽었는데 이름만 쭉 써 내려가도 세 페이지를  넘어섰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다시 노트를 펼치니 그 인물들 하나하나와 함께 역사의 산맥을 넘어온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동네 버스 정류장 이름 중 하나가 '조소앙활동터'인데 이 소설에서 그 이름을 발견하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12년 만에 완성된 소설이라 들었다. 출간될 당시에 왜 이 책을 금방 집어 들지 못했는지 안타까웠고 지금이라도 읽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소설가들 덕분에 독자들은 또 한 번 가슴속에 근현대사라는 대륙을 들여놓게 된다. 조선희의 신대륙은 넓고도 뜨거워서 더 특별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짝사랑의 위대함이 만든 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