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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Apr 06. 2021

이야기, 가방에 들어가신다

김탁환의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왔을까』

역사 소설과 사회파 소설을 주로 쓰던 김탁환이 연예기획사 연습생 출신의 사업가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것도 가죽으로 가방을 만드는 유다정이란 당차고 매력적인 여자의 이야기다. 왜 가방인가. 가방이라는 오브제를 통해 성공은 물론 인생의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서다. 유다정의 엄마 형숙 씨는 죽기 전 딸에게 "너는 내게 가방이란다."라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겼는데 다정은 '풀리지 않더라도 인생에 이런 수수께끼 하나쯤 품고 사는 게 없는 것보다는 훨씬 좋다'라는 오디세이적 정신으로 눈 쌓인 자작나무 숲을 나와 늑대 표범 호랑이 사자가 득시글거리는 도시로 향한 것이다.

가방이라는 메타포를 문학으로 치환하면 수수께끼의 주인공은 그대로 김탁환이 된다. 소설가는 흥미로운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독고찬, 방지훈, 죽 선생, 타로 정, 비컨, 지요한, 아서 등을 등장시키고 형숙 씨, 혜경, 페인터 눈, 대숙 등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캐릭터들도 만든다. 그리고 그들은 작가가 만든 가방 안으로 들어가 사업과 야망, 연애, 섹스, 후회, 희망 들이 넘실대는 일생일대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천상 문학가인 김탁환은 가방을 둘러싼 숨 가쁜 모험 속에도 셰익스피어와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들을 배치하는 여유를 부리고 발자크의 커피 예찬론을 새삼 거론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에 두고 하는 "쓰지 않은 대본이 인생이다"라고 하거나 "해는 해바라기를 모르지만 해바라기는 다른 해바라기를 알지."라며 짝사랑을 위로하는 문장들도 일품이지만 유다정이 그레이스 직원들에게 밤새워 쓴 편지(강릉에서 삼대째 두부를 만드는 이를 만난 이야기로 시작하는)는 그 문단만 떼어놓아도 봐도 명문이다.

또한 자신이 이야기꾼임을 숨긴 적이 없는 김탁환의 면모는 남자 주인공인 아서의 이름을 아껴두었다가 뒤늦게 밝히는 데서 여지없이 발휘된다. 소설의 구조가 아주 잘 짜이지 않으면 불가능한 기술인데 이는 소설 속 소설과도 같은 아서의 편지 스토리가 어디까지 사실일까 의심하는 페인터 눈에게 '디테일!'이라는 근거를 대는 채 실장의 대답에서 짐작할 수 있다. 즉, 아서가 쓴 편지글들엔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의 디테일이 훌륭하면 할수록 관객들은 마음 놓고 스토리라는 롤러코스터에 기꺼이 몸을 싣는다'는 김탁환의 집필 철학이 숨어 있는 것이다.

역사소설을 쓸 때는 강물처럼 의연하게 흘러가던 김탁환의 이야기는 가방과 풍차를 만나자 때로는 계곡물처럼 굽이치고 때로는 바닷물처럼 높은 파도를 만들며 독자를 휘감는다. 소설은 다정이 독고찬의 구혼을 뿌리치는 충격적인 장면부터 시작해 줄곧 넷플릭스 드라마 같은 극적 전개로 이어지는데 특히 마지막쯤 구치소 면회실에서 채 실장이 입 모양 만으로 "제가 두 개를 만들었거든요."라고 속삭이는 장면은 읽는 이를 벅차게 만드는 반전이다.

왜 주인공 이름이 아서였는지, 회사 이름이 그레이스였는지는 작가가 1년 간 가죽 가방을 공부하기 위해 매주 목요일 찾아갔다던 회사 이름 '아서앤그레이스'를 밝힘으로써 알게 되었다. 그는 의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자신의 브랜드로 등장인물의 이름을 삼은 소설을 읽는 이의 마음은 어땠을까 잠깐 상상해 보았다. 봉준호 감독에게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가 가장 세계적인 이야기'라는 가르침을 주었다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처럼 이 이야기도 한 사람을 위한 소설처럼 보이지만 결국 만인을 위한 소설임에 틀림없다. 지금 이 책을 펼쳤다면 당신은 이미 이야기 가방 안으로 들어간 거나 마찬가지다. 이제 가방 속을 신나게 달리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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