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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편성준 Oct 15. 2021

‘박근형’이라는 물음표

극단 골목길 연극 《이장(移葬)》리뷰

아내와 함께 극단 골목길의 신작 연극 《이장》을 보러 갔다. 우리는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이후 박근형 작가의 팬이 되었다. 웃음과 눈물과 한숨이 교차하는 그의 연극은 냉소적이지만 맛깔난 대사를 음미하는 것만으로도 차별점을 이루는 데다가 고맙게도 해를 거듭할수록 극단 배우들과의 호흡이 깊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이번 작품은 죽은 남편의 이장(移葬), 즉 산소를 옮기는 문제로부터 시작한다. 불이 커지면 비스듬하게 놓인 침상 위에 엄마가 누워있다. 조금 있다가 남편의 동생인 시아주버님과 조카가 들어와 인사를 한다. 남편의 동생은 자기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형님의 산소에 물이 차올라서 옮겨야 한다는 용건을 전한다. 엄마는 그렇게 해야 한다면 그렇게 해야죠,라고 말하며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뭐냐고 묻는다. 사실 남편의 무덤을 옮기는 건 서사의 시작을 위한 맥거핀에 지나지 않고 진짜 얘기는 6.25 때 함경도에서 내려와 입때껏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엄마와 그 자식들이 각각 어떻게 삶을 영위하고 있는지에 대한 파노라마적 연대기다.

이태리 피자집을 하다가 망하고 이태리 유학한 주방장에게 아내까지 빼앗긴 큰아들은 엄마한테 와서 얹혀살고 있다(엄마, 오만 원만 줘봐요. 지난주 로또 하나도 안 맞았냐? 맞았으면 내가 들어왔겠어요?). 엄마는 매사에 짜증만 내는 큰아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옆집에서 자꾸 누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말하지만 아들은 환청일 거라 대꾸한다.

엄마는 딸이 데리고 온 젊은 애인 가브리엘을 부른다. 딱 한 번 불렀는데도 오른쪽 방에서 외국인 말씨를 쓰는 가브리엘이 톡 튀어나온다. 그는 항공사 다니는 딸이 데려온 한국계 브라질리언 남자 친구인데 요즘은 한국말을 많이 익혀서 큰아들 약을  바짝바짝 올리고 있는 중이다. 엄마가 가브리엘에게 돈을 꿔달라고 하자 그는 스마트폰으로 증거용 녹음을 하며 큰아들에게 돈을 꼭 갚으라 약을 올리고 엄마는 그 장단에 맞춰 채무 증인을 선다(2021년 10월 12일, 큰아들 십만 원 대출. 엄마, 증인....... 엄마 : 증인!).

둘째 아들은 요기요 배달원을 하고 있는데 형을 만나자마자 헤어진 형수 욕부터 한다(정말 나쁜 년이야. 어떻게 피자 화덕 앞에서 두 연놈이 떡을 쳐? CC-TV 없었으면 그것도 몰랐을 거 아냐. 내가 이 년을 만나기만 해 봐라). 자식들에게 쌀쌀맞게 대했던 아버지 욕도 빼놓지 않는다(조카 졸업할 때 보니까 걔가 나이키를 신고 있더라고. 우리 아버지가 사줬대. 나는 신고 싶어도 말도 못 꺼냈는데. 대단하셔 우리 아버지. 밖에서는 호인이지). 그의 아내는 학습지 교사를 하다가 지금은 주식으로 갈아탔는데 돈 버는 재미가 아주 쏠쏠하단다. 그녀는 틈틈이 동화 작가로도 활동하는 팔방미인이다. 그러나 모처럼 밤에 아주버님과 셋이 위스키를 마시다 취하자 쓸쓸하고 황량한 마음의 그림자를 남편에게 드러낸다(오빠, 너 이 새끼. 말 존나 싸가지 없이 하네? 거기서 바람이 왜 나와...? 나 하루 종일 일했다구. 나 힘들다구, 이 새끼야).

하나밖에 없는 딸은 잠깐 엄마랑 지내러 왔는데 이제 또 싱가폴로 떠나야 한다. 언제 돌아오냐는 물음에 “내년 크리스마스에나?”라고 아무렇게나 대답한다. 자기는 동남아를 주로 도는 직원이라 회사에서 발령을 내면 무조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설명하기 힘들단다. 딸은 어렸을 때 매일 술만 마시던 아버지를 추억하며 엄마에게 아버지를 사랑했느냐고 묻는다(네 아버진 다른 여자들 사랑했다). 그녀는 엄마가 시켜서 술집으로 아버지를 찾으러 갔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엄마. 미안해. 나 그때 아버지 안에 없다고 거짓말했어. 아냐, 괜찮아. 나 다 알고 있었는데 들어가기 겁나서 너 보낸 거야). 엄마에게 너무 함부로 굴지 말라고 충고하는 가브리엘에게 사납게 욕도 한다(꺼져, 병신아!). 가브리엘은 아르헨티나에 살던 할아버지가 브라질에 가서 공장을 했는데 그때 딸이 한국 남자를 만나는 바람에 태어난 친구다. 그래서 말씨는 외국인이지만 얼굴은 한국 사람이다.


누구를 들여다봐도 간단치 않은 사연들이고 잘 풀리지 않는 인생들이다. 그 일그러진 인생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은 강지은 성노진 김주완 이호열 이상숙 심원석 박상훈 조지승 들이다. 특히 요즘 JTBC 드라마 《인간실격》에서 강재 엄마로 출연하는 강지은의 대사톤과 억양은 기억할 만하다. 성노진 이호열 등 다른 배우들의 호연도 두말하면 사족이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아내는 매표소에 가서 극단 골목길의 이전 작품《코스모스 : 여명의 하코다테》티켓을 내보여 30% 할인을 받았다. 계정을 해킹당해서 인스타그램에도 요즘에나 다시 포스팅을 하기 시작했다는데 아내는 어디서 이런 귀한 정보를 얻는지 모르겠다.


배우로 출발해 극작가이자 연출가가  박근형은 《청춘예찬》으로 대한민국의 상이란 상을 죄다 휩쓸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장》은 극단 골목길에서 선보이는 올해  번째 작품이다. 아내와 나는 어쩌다 박근형의 연극을 이렇게 많이 보게 되었을까. 그는 연극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를 아프고 슬프고 짓궂은 방식으로 묻는다. 위에 얘기한 작품 말고도 《너무 놀라지 마라》 《만주전선》 《해방의 서울》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그의 작품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청춘예찬과 너무 놀라자 마라는 극본집으로  읽었다). 코로나 19 팬데믹 이후 생존에 대한 물음표만 움켜쥐고 있는 우리에게 질곡의 현대사와 삶에 대한 물음표를 일깨우는 박근형 작가와  배우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10 24일까지 혜화동주민센터 옆에 있는 <예술공간혜화>에서 상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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