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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an 01. 2024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

다큐멘터리 <크레센도>를 보고

영화의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시작한 순간에도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앉아 있던 줄의 대다수가 좌석에서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 광경에 마음속 깊이 감동이 밀려들었다. 짝꿍도 나도 한동안,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여운을 어쩌지 못한 채, 화면이 완전한 어둠으로 저물 때까지 차마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윽고 화면을 등지고 천천히 걸어 나오던 길의 나는, 흡사 2시간 동안 천국 가까이에 있는 다른 행성에 머물다 나오는 기분이었다.

다큐멘터리 <크레센도>를 보고 난 후의, 잊지 못할 풍경과 여운이었다.




다큐멘터리 <크레센도>는, 임윤찬이 우승했던 2022년 반 클라이번 콩쿠르 본심의 뒷 이야기들을 다룬 작품이다. 작년에 60주년을 맞은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미국 피아니스트 반 클라이번을 기리기 위해 18세~30세의 연주자들을 대상으로 4년마다 개최되고 있는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국제 콩쿠르다.



<크레센도>의 예고편만을 보고는, 임윤찬의 천재적 재능과 그에 관한 찬사가 작품의 주 내용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크레센도>는 '점점 세게'라는 용어의 의미와는 역설적으로, 본선, 준준결승, 준결승과 결승에 이르기까지 30명의 참가자들이 18명, 12명, 6명 그리고 3명으로 점차 좁혀져 가는 그 피나는 행로를 섬세하고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었다. 한편으로는, 콩쿠르 참가자들이 극한 긴장과 스트레스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열정과 존경을 결코 잃지 않으며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을 통해, 크레센도처럼 커져가는 감동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했다.



전 세계에서 모여든 30명의 참가자들은 그 모습도, 사연도 다양하다.

임신 6개월이자, 10개월 아기 엄마인 러시아 여성, 길에서 주워온 업라이트 피아노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온 미국 청년, 아쉽게 떨어진 지난 콩쿠르의 악몽을 극복하고 재도전하는 남성,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에서 야심을 품고 온 20대 청년 등. - 신기했던 사실 하나는, 다큐 중간중간 등장하는 참가자들의 인터뷰에서 국적과 상관없이 모두들 하나같이 영어를 능숙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오직 임윤찬만이 느릿한 한국어로 인터뷰에 응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모습이 인상 깊으면서 왠지 흐뭇하기도 했다. (아마도 임윤찬을 제외한 피아니스트들 대부분이 외국 유학생활에 익숙하기 때문인 듯하다) -



예술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그 아름다움으로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해 주며, 받아들이는 이의 주관적 해석과 느낌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기에, 어찌 보면 경쟁을 통해 그 가치를 매긴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클래식이 외면받고 설자리를 잃어가는 지금의 상황에서, 한 연주자가 재능을 갖춘 수많은 연주자들과 겨루는 국제적인 콩쿠르에서 우승을 한다는 것은, 한정되고 특별한 지위를 통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개인의 고유한 예술을 펼칠 기회를 더 단단히 보장받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콩쿠르 결선으로 향하는 그 과정은 참가자들의 극한 긴장감, 좌절과 환희로 가득하다.



<크레센도>는, 역대급의 관심과 호응을 얻고 있는 우승자인 임윤찬에게만 집중하지는 않는다.

다큐의 마지막 씬 직전까지, 참가자 전원을 골고루 평등하게 비쳐주며, 각각의 피땀눈물 어린 사연을 당사자의 인터뷰와 함께 들려준다.

무대 위 화려한 모습 뒤에 가려진, 날 것 그대로의 현실을 보여준다. 참가자의 긴장한 표정, 갈 곳 잃은 듯한 시선, 대기하는 중에도 끊임없이 탁자 위를 유영하며 연습을 이어가는 손 끝, 무대 위 침착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긴장된다'며 지휘자에게 하소연하는 무대 뒤 임윤찬의 모습 등... 그 장면들에서 나는, 천상에 닿아있는 듯한 연주가 펼쳐지기 전, 얼마나 수많은 잠 못 드는 밤, 실망, 자책과 눈물, 그럼에도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이 모든 것을 극복해 내는 귀한 마음이 선행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콩쿠르 심사자가 극찬하는 임윤찬의 모차르트와 그의 어마어마한 테크닉, 개성, 상상력과 짜릿함도 좋았지만, 그보다는 오로지 음악과 피아노 연주만을 생각하는 참가자들의 마음들 때문에 다큐를 보는 내내 감정이 끊임없이 요동쳤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하는 음악을 세상으로 꺼내기 위해, 어려운 것도 감수하는 것이 음악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임윤찬의 인터뷰에서, 온 열의를 바치는 대상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경이로운 상태가 무엇일까,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삶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극한의 행복과 고귀한 감정이 아닐까. 그러한 감정과는 머나먼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땀과 눈물에서 애틋하고도 숭고한 미를 오롯이 느낄 수 있었다.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음악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결국엔 그들을 음악과 하나가 되게 만드는 그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서, 크나 큰 행운을 얻은 것 같았다.



결말에 이르러 <크레센도>는 꽤 오랜 시간 임윤찬의 결선곡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 영상을 보여준다. 60여 년 전, 치열했던 냉전시대의 차가운 벽도 녹여냈던 스물셋 청년 반 클라이번의 라흐마니노프 3번 콩쿠르 연주 영상이 임윤찬의 연주와 교차 편집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청년 반 클라이번의 흑백의 라흐마니노프와, 21세기 18세 소년의 손끝에서 펼쳐지는 천연색의 라흐마니노프가, 거대한 감동을 몰고 오며 함께 맞물려 펼쳐진다. 수많은 클래식 애호가 - 심지어 클래식 문외한인 사람들까지 - 들의 심금을 울리는 그의 예술이, 천상의 작곡가들에게 헌정되는 고귀한 순간이었다. 치열한 경쟁을 벌였지만, 끝내 마지막까지 살아남지는 못했던, 경쟁자라기보다는 동지인 연주자들의 마음을 함께 담아 임윤찬만의 라흐마니노프가 이 세상을 향해 말을 건네는 순간, 피아노의 현을 빌려 음악 그 자체가 된 임윤찬이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의 목소리를 아우르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지금도 여전히, 반 클라이번 콩쿠르 계정의 임윤찬의 결선 영상은 클래식 애호가뿐 아니라, 나 같은 간헐적 클래식 팬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 이미 1340만 회 돌파한 조회수는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다. 콩쿠르 주최 측에서도 놀랄 만큼 감탄 어린 반응들이 이어지고 있다.

영상 아래에 끊임없이 이어지는 댓글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국경과 세대를 뛰어넘는 다양한 목소리들이, 한 청년이 건네는 아름다운 연주에 모여든다. 인생의 끝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이 그의 연주에서 위안과 감명을 느낀다. 생의 아름다움을 누리고, 삶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로이 한다. 훌륭한 연주자는, 이토록 사람들에게 행복을 선사하고 감동을 준다. 그의 연주를 들으며 나는 내가 살아있음에,  살아있는 감각으로 이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가시지 않는 여운과 고무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처음으로 네이버 영화 평점을 남겼다. 앵무새한테 뜯길까 우려돼 묵혀두었던 임윤찬의 포스터를 꺼내 시선이 닿는 곳에 정성스럽게 붙였다. 어둡고 나쁜 감정이 올라올 때마다 그의 사진을 보며 이날의 감동을 돌이키겠다는 다짐으로.

그리고 생각했다. 먼 길도 감수하고 극장으로 달려가기를, 커다란 공간 가득 울리던 아름다운 선율에 몸을 푹 담그고, 예술과 예술에 진심 어린 마음들만이 주는 최고의 선물을 받고 오기를 잘했다고..

결선 참가자 6인 중 3인이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을 연주했는데, 실제 '반 클라이번'이 1958년 제1회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결선에서 이 곡을 연주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자몽이에게 들키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기를..

드디어 2024년 새해가 밝았어요.

우리 올 한 해도 부디 건강하게, 마지막 날까지 잘 버텨보기로 해요.

이 글을 읽고 계신 모든 분들이, 생의 아름다움을 충분히 누릴 수 있는 2024년이 되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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