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 일주일이 지난 무렵부터 학교에 늦기 시작한 송이는, 본격적으로 날이 따스해지자 지각하는 횟수가 점점 늘어갔다. 담임은 지각하는 아이들을 방과 후에 남겨 벌 청소를 시키거나 독후감 과제를 내줬다. 송이는 벌 청소를 할 때마다 내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쩐 일인지 독후감 과제를 도와달라는 말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송이는 독서를 꽤나 좋아하는 친구였다.
청소를 도와주는 건 할 만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송이가 학원 수학 숙제를 도와 달라고 당당하게 내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수학시간 선생님이 내준 문제를 그럭저럭 풀어내는 나를 유심히 지켜본 것 같았다.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딱 잘라 거절하기에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청소당번 아이들까지 모두 귀가하고 난 후, 빈 교실에 남아 송이와 수학 과제를 함께 풀었다.
나는 국어나 영어 등 언어를 다루는 과목엔 젬병이지만, 수학과 과학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다. 특별히 과외를 받은 적은 없다. 밑줄을 쳐가며, 정답이 없어 보이는 작가의 숨은 의도를 찾아내는 국어보다, 숫자로 답이 정확하게 떨어지는 수학 쪽이 명쾌해서 더 좋다. 할머니 말에 의하면 우리 집안사람들이 원래 숫자에 밝다고 한다. 시장에서 일한 오랜 세월 동안, 콩나물과 두부 값을 계산기 하나 없이도 늘 정확하게 계산해 냈다며 자랑스럽게 말한 적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계산을 하며 벌어먹는 삶을 택하고 싶지는 않다. 늘 머릿속으로 숫자를 굴리며 살아가야 하는 인생은 생각만 해도 한숨이 절로 나온다.
그날도 송이와 함께 수학문제를 풀고 있었다. 아직 봄이었지만 초여름의 열기가 느껴지던 날이었다. 문제를 풀던 송이가 어느 순간 가방 속을 뒤적이더니, 까만색 고무줄을 꺼내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풍성한 머리카락 아래 숨어있던 솜털이 보송보송한, 하얗고 가느다란 송이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열린 창틈으로 누군가가 향긋한 입김을 불어넣기라도 하는 듯, 희미한 꽃내음이 실려 왔다. 곁눈질로 송이를 흘끔 쳐다보는데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 자리를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쯤 지났을까. 교실로 다시 돌아오니 송이는 왼팔을 베고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나는, 혹여 송이에게 들릴까, 고개를 돌린 채 심호흡을 한번 길게 내쉰 후 조용히 자리로 돌아왔다. 송이를 깨우지 않고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어쩐지 내 시선이 자꾸만, 가만가만 오르내리는 송이의 목덜미로, 목을 받치고 있는 손목으로 향했다. 왼쪽 소매 끝이 손목 위로 올라가 있었다. 말려 올라간 소매 아래로 목보다 더 가는 송이의 손목이 시야에 들어왔다. 손목 위에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직선의 형태들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손목 가까이로 몸을 기울여 자세히 들여다보던 순간,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얼얼해졌다. 그때였다. 꿈을 꾼 듯 눈을 감은 채 무언가를 중얼거리던 송이가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일어났다. 나는 시선을 딴 곳으로 돌리며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어, 언제 왔어? 미안. 내가 좀 피곤했나 봐. 오늘은 이쯤 하고 그만 가자.”
송이가 책을 덮고, 필기구들을 필통에 챙겨 넣으며 말했다.
“응… 그런데 그거, 뭐야…?”
나는 턱끝으로 슬며시 송이의 팔목을 가리켰다. 송이가 내 시선이 향하는 쪽을 바라보더니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별 거 아니야.”
침착함을 가장하려는 듯한 송이의 목소리에 내 궁금증이 커졌다.
“그러니까, 뭐냐고…?”
질문을 하는 내 눈을 송이가 무안스러울 정도로 빤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알고 싶어?”
“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송이의 대답을 듣고 싶었다. 송이는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칼로… 그은 자국. 오래전 일이야. 그냥… 어떤 느낌일까 궁금했거든.”
송이가 무심하게 던지는 ‘그냥’이라는 단어가 내 마음으로 들어와 날카롭게 꽂히는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도대체 무얼까, 어리둥절했다.
“그 질문과 표정은… 혹, 나에 대한 관심인 건가?”
송이가 턱을 괸 채로 내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 마음대로 생각해.”
이렇게 말한 뒤 책상 위를 정리하려는데, 가슴에서 다시 소리가 들릴까 봐, 그 소리를 송이에게 들킬까 봐 불안해졌다.
우리 사이에 흐르던 정적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질 때쯤이었다.
“짝퉁 넌,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그랬었지?”
나는 하마터면 반가운 기색을 내비칠 뻔했다.
“그런데, 난 그 말이 그렇게 듣기 싫더라. 남들처럼 살라는 말… 나는 나인데 왜 남들처럼 살라고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산다는 건 이상하고 불편한 일 아냐?”
“누가 너한테 그렇게 말해?”
“우리 엄빠가. 나더러 그냥 남들처럼만 살래. 내겐 큰 기대 걸지 않을 테니까 부담 갖지 말고….”
“넌 평범하게 사는 게 싫어?”
“난, 싫어. 점수 맞춰 대학 가고, 스펙 쌓고, 졸업하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가, 나이 차면 결혼 하고, 아이 낳고,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거… 난 완전 별로거든. 누가 내 인생을 거푸집 안에 억지로 들이붓는 느낌이야. 한 번 사는 인생 그렇게 살다 가면 너무 아깝잖아. 재미없고 답답해. 난 내 삶을 살고 싶어. 오로지 나만의 삶 말이야….”
송이의 말이 완전히 이해되진 않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꿈과 인생에 대해 얘기할 때 송이의 얼굴은 빛이 난다는 걸.
“서울대 다니는 오빠가 있어.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스타일이야. 나랑은 많이 달라. 어렸을 때부터 알게 모르게 오빠와 비교당하며 살아왔던 것 같아. 난 그게 너무 싫었어. 자괴감도 들었고… 난 그냥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껴졌거든.”
“지금도, 그래?”
“지금은 괜찮아. 지금의 나는 뭐랄까… 아무튼, 예전과는 좀 달라졌어.”
송이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나를 내려다보며 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송이 뒤편에서 밝은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송이를 달라지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호기심이 일었지만, 마음속에 묻어둔 채 송이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