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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02. 2024

#6 계절이 깊어갈 때

  봄이란 계절에도 ‘깊어간다’는 표현을 쓸 수 있다면 내겐 요즘이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학교 주변에는 학교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벚꽃나무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서 있다. 특히 교문에서 학교건물 입구까지 이어지는 길 양쪽을 호위하고 있는 벚꽃나무들은, 벚꽃이 절정에 이를 때쯤이면 하늘을 가릴 만큼 풍성한 벚꽃들로 핑크빛 터널의 장관을 만들어낸다.


  교실 창밖의 벚꽃가지들이 팔을 뻗어 새하얀 벚꽃 잎들을 뿌리는 날에는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기가 억울해질 지경이다. 그때쯤이면 아이들은 교과 선생님들에게 야외수업을 하자고 회유와 보채기를 반복한다. 나는 주로 가만히 그 광경을 지켜볼 뿐이지만, 코밑이 거뭇거뭇한 남학생들까지 합세해 애교 섞인 감탄사를 쏟아내면, 선생님들은 못 이기는 척 우리들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가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대화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봄은 사랑의 계절인가 보다. 교복 안에 꽁꽁 숨어있던 아이들의 마음에도 벚꽃물이 들어가나 보다. 요즘 들어 우리 반에 커플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교실과 복도에서 스킨십을 하는 아이들이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심지어 학교 옥상에서 비밀스럽게 스킨십을 나누는 아이들도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 장면을 목격한 이웃 아파트 주민들에게서 민원이 들어온다는 얘기도.—이 대목에서 난 사람들이 어떻게 학교 옥상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는 했다—


  어떤 아이들은 과감하게 복도에서 키스를 시도하다 교무실에 불려 가 선생님들에게 혼이 나기도 한다. 굳이 키스와 뽀뽀를 구분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그런 얘기들을 들으면 ‘도대체 왜들 저럴까?’ 싶은 생각이 들다가도, 키스 한 번 맘대로 못하는 고등학생 신분이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키스를 해보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직은….


  송이와 내가 함께 있는 모습이 아이들 눈에 띄면서 우리 둘이 사귀는 게 아니냐는 말들이 오고 갔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부인했다. 송이는 내가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 했고, 나는 말도 안 된다,라고 반박했다. 처음에는 내 반응에 대해 별 얘기를 하지 않던 송이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그 반응은 뭐야? 말이 안 될 것까진 없잖아,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을 눈앞에 두고?”


  물을 마시고 있던 난 송이의 말에 갑자기 사레가 들렸다. 송이가 내 모습을 의구심 가득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너 혹시… 그거야?”

  “그게, 뭔데…?”

  “거 있잖아. 이성에는 관심 없고, 같은 성별에만 관심 있는 그런…?”

  “그런 거 아니야.”


  실소가 나오는 나와 달리 송이의 표정은 자못 진지해 보였다.


  “그럼 뭐야. 왜 말이 안 돼? 너 여친 사겨본 적 없어?”

  “응, 없어.”

  “한 번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 무성애자야?”

  “무성애가 뭐야, 동성애 비슷한 거야?”


  근처에 있던 진호가 다가오더니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넌 애가 왜 이렇게 끼어드는 걸 좋아하냐?!”


  송이가 짜증 섞인 표정으로 진호를 돌아봤다. 잠시 나와 진호를 번갈아 바라보던 송이는 이내 체념한 듯 손을 몇 번 휘저어 보이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진호도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잠시 머뭇거리던 진호가 마치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너희 할머니 요즘 괜찮아?”

  “응. 잘 지내. 왜…?”

  “그냥, 궁금해서. 그때 다쳤으니까….”


  진호는 지난번 골목길에서의 사건이 꽤 신경 쓰였었나 보다. 신경 써주는 마음이 고맙긴 했지만, 학교에서 더는 할머니 얘기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다음 수업 교과서를 꺼내 책장을 넘겼다. 시계를 보니 마지막 수업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한동안 진호는 딴청 피우는 나를 지켜봤다.


  “한국 와서 처음 봤어. 그런 할머니들….”


  ‘그런 할머니들’이라는 진호의 말에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올라오는 뾰족한 감정을 누르려 애썼다.


  “걱정해 주는 건 고마운데, 신경 좀 꺼주면 좋겠어.”

하지만 진호는 내 말은 안중에도 없는 것 같았다.


  “난 어리고 건강하지만 배달 다니는 거 힘든 일이야. 나는 다리도 튼튼하고 오토바이도 탈 수 있어. 하지만 할머니는 다리도 불편하고 힘도 없어. 얼마나 힘이 들까? 돈이 부족한 거면 신우 너가 아르바이트하면 되잖아 나처럼….”

  “그만해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너무 주제넘는다, 너?!”


  순간 올라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아이들의 놀란 시선이 우리 쪽을 향했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진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사과한 뒤 자리로 돌아갔다. 다행히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아이들은 이내 우리에게서 관심을 거두었다.     


  쉬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던 나는, 학교를 마친 후에도 음악을 들으며 자리에 머물러 있다가 마지막으로 교실을 빠져나왔다. 중앙현관을 나서자 주차장 뒤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들 몇 명이 누군가를 가운데 두고 빙 둘러 서 있었다. 옆 반 근수 무리였다. 근수는 중학교 시절 함께 놀던 친구들 중 하나지만, 지금은 지나갈 때 가볍게 인사 정도만 하고 지내는 사이다.


  “베트남 새끼… 씨발… 참견…”


  거리 때문인지 분명 큰 소리임에도 말이 끊겨서 들렸다. 그런 와중에도 명확하게 들린 ‘베트남’이란 단어에 나도 모르게 발길이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우리 학교에서 베트남과 관련된 아이라면 내가 아는 한 진호 말고는 없었다.


  “너희 그러면 안 돼. 그거 큰 잘못이야.”


  역시나, 진호의 모습이 보였다.


  “하… 씨발. 이 새끼 존나 재수 없네. 베트남 새끼가 얌전히 짜져 지낼 것이지 뭐 이렇게 말이 많아!”


  근수는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근수와 아이들이 내 쪽을 돌아봤다.


  “신우, 너냐?”


  근수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일인데 그래?”

  “넌 알 거 없어. 그냥 가던 길 가.”


  내가 자리에서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근수가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 새끼가 주제도 모르고 깝치잖아. 우리가 얌전히 일 보고 있는데 끼어들면서. 누가 베트남 새끼 아니랄까 봐 꼭 지 면상 닮은 구린 오토바이나 몰고 다니면서 말이야.”


  근수 뒤편에서 진호가 눈을 홉뜬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무슨 일 보는데 그러냐?”

  “우리가 존나 정중하게 어떤 할머니한테 담배 부탁 좀 했거든. 근데 이 새끼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깽판 치잖아. 지 주제도 모르고.”

  “그 정도면 알아들었겠지. 그만해. 쌤들 내려오는 것 같던데….”


  내가 뒤를 가리키며 말하자 근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내 손끝이 향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근수는 진호에게 눈을 부라리며 거친 말을 몇 번 더 내뱉더니,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친구들과 함께 후문 방향으로 사라졌다.


  “신우…”


  돌아서 가려는 나를 진호가 불러 세웠다.


  “고마워. 그리고… 아까 미안했어.”

  “아니야. 나도 소리 질러 미안해. 아무튼 쟤들이랑은 안 엮이는 게 좋으니까 조심해.”

  “응 그럴게. 그런데… 주제 모르는 거, 그거 무슨 뜻이야? 여러 번 들었지만 아직도 그거 뭔지 정확하게 몰라.”


  뜨끔했다. 나도 아까 진호에게 비슷한 말을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참견 심한 사람들한테 하는 말이야.”

  “그런 거구나….”


  왠지 진호의 눈빛이 슬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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