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이다. 선생님에게 방학은 어떤 의미일까? 학생에게 방학은 어떤 의미일까? 너무 당연한 걸 묻고 있나요? 과연 그럴까요? 학생으로서 보낸 수많은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 생각해보면 놀랍게도 대부분의 방학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럼 선생님으로서의 방학은? 이 일을 시작한 지 몇 년이 되었지만 진짜 방학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그래, 뭔가 지루하고 멍하고 할 일 없다는 이 느낌, 이게 방학이다.'
대학교 어학원에서는 수업을 3개월 학기제로 운영하고 강의료를 강의 시간 기준으로 받기 때문에 '방학'이 있었지만 '방학'이라는 느낌이 없었다. 그저 일이 없는 시기라는 생각뿐. 롬싹에서는 쥐꼬리만큼 밖에 안되지만 월급이라는 걸 받으니까 뭔가 진짜 '방학'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한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했다. 작년과는 달리 모든 선생님은 10월 10일까지 학교에 와서 출근 체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년에도 태국인 선생님들은 방학 시작 후 10여 일 정도는 출근한다는 걸 알고 있기는 했다. 많은 선생님들이 성적 처리 작업이 끝나지 않은 상태로 방학을 하니 당연히 잔무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그럴 수 있는 조치라고만 생각했었다. 하지만 외국인 선생님들은 모두 방학 전에 성적 처리 작업을 끝냈고 태국어로만 진행되는 세미나에 참석할 것도 아니니 학교에 나와도 정말 할 일이 없는데 왜 나에게 출석 체크를 요구하는 것일까? 부장 선생님으로부터 되돌아온 대답은 내가 월급을 받기 때문이란다.
'아, 그놈의 쥐꼬리 때문에......'
몹시 불편한 마음으로 모든 계획된 일정을 일주일 뒤로 미루니 내 앞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뚝' 떨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계획되지 않은 온전한 일주일이.
불행히도 그 일주일은 각종 문제와 심리적인 불안으로 얼룩진 어두운 기억으로 남고 말았다. 첫 번째 시작은 에어컨의 고장이었다. 방학이 되고 하루종일 집에 있어보니 낮시간에는 에어컨을 켜고도 방에서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덥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실제 기온이 높아서라기보다는 강한 햇볕이 지속적으로 집을 데우기 때문이었다. 하루 종일 에어컨을 켜 놓았고 정말 일 분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내 에어컨에서 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치기까진 또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만 했고 난 이러다 죽겠다 싶을 만큼의 더위를 체험했다. 여전히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선.
다음으로 나를 정신적으로 매우 괴롭게 했던 문제는 바로 학생들의 성적 처리였다. 내가 일하는 학교는 올해 처음으로 한국어 전공반을 만들었다. 불행히도 한국어 전공반 학생들은 스스로 원해서 온 학생이 거의 없다. 지원을 한 전공반에서 성적이 나빠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갈 곳이 없어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18명밖에 안되는데 그중 8명이 이번 학기 4학점 만점에 0학점을 받게 되었다. 8명 중 5명은 아예 중간고사 이후로는 내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나는 이 학생들에게 0학점을 주는 것에 대해 불편한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이미 성적 처리도 다 끝났는데 태국인 한국어 선생님(이하 태쌤)이 조심스럽게 학생들에게 0학점을 줄 수는 없으니 다른 과제를 내어주고 점수를 주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유를 들어보니 대략 두 가지 정도로 정리가 되었다. 첫째는 학생들에게 0학점을 주더라도 실제로 학생들이 0학점을 받을 수 없는 시스템의 문제다. 0학점을 받으면 학생들은 부모님과 함께 학교에 와서 여러 단계의 서류 작업을 거쳐 먼저 각서 같은 걸 쓰고 과제를 받은 후 어쨌든 학점을 취득한다는 것이다. 각서를 쓰고 난 다음 학기에도 0학점을 받고 그 과목이 전공과목이라면 그때는 시스템 상으론 전공을 바꾸든지 학교를 옮기든지 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이 학생들을 받아줄 다른 전공반도 없고 학교도 없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0학점을 주는 것은 그저 소모전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시스템이 오히려 시스템을 막는 어처구니없는 현실. 그러니 학교나 부모가 개입되는 단계 이전에 학생들에게 적당한 과제를 주고 점수를 올려주어 최소 학점인 1학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 나도 편하고 태쌤도 편하고 학생도 편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학교 역시 성적이 낮은 학생들이 많은 경우 학교 평가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을 우려해 실질적으로는 학생들에게 0학점을 주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나는 학생들의 그동안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내가 아무리 수업에 오지 않으면 학점을 줄 수 없다고 이야기해도 그들은 이미 내가 그들의 점수를 올려 줄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 말이 우스웠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태국 선생님과의 긴 대화 끝에 학생들에게 한 번의 기회를 더 주기로 결정했다. 내가 액스트라 과제를 준다고 하자 수업에도 오지 않던 4명의 학생들이 사무실에 찾아와 한동안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기도 하면서 갑자기 친한 척을 하는 것이 아닌가. 나 역시 인간인지라 나는 그 아이들이 무척 얄미웠다. 8명의 학생들에게 같은 과제를 내주었고 그중에 3명의 학생이 과제를 제출했다. 그 문제의, 수업도 들어오지 않은 5명의 학생들은 끝내 마지막 기회도 잡지 않았다. 아마 그 아이들은 착하게 생긴, 태국말도 잘 못하는 한국인 선생님이 설마 자기들에게 0학점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그들에게 0점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아마 개학 후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잠시 시달릴 수도 있겠지만 난 학생들에게 최소한의 책임감이라는 걸 알게 해주고 싶었다.
과제를 제출한 학생들의 점수를 올려 주는 과정도 결코 편하지 않았다. 나는 극심한 죄책감 같은 걸 느꼈고 심리적으로 분노를 느끼기까지 했다. 많게는 30점 이상의 점수를 올려줘야만 하는데(1학점을 받을 수 있는 기준은 100점 만점에 49점이다.) 다른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건 정말 엄청난 일인 것이다. 내 기준에선 이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다. 우습게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이런 상황을 알고 있다. 매일 수업에 출석하고도 간신히 1학점을 취득하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수업에 한 번도 들어오지 않고도 엑스트라 과제 한 번 대충 얼렁뚱땅해서 쉽게 1학점을 얻는 학생들도 있다. 심지어 이렇게 엑스트라 과제를 하지 않는 학생에게도 대부분의 태쌤들은 1학점을 준다. 0학점을 주고 난 뒤의 치러야 할 귀찮은 일들이 싫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것을 학생들을 위하는 일인 것으로 포장한다는 생각이 든다.)
학생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 학점은 4학점인데 4학점을 받는 기준은 100점 만점에 79점이다. 이 기준 역시 내 입장에선 너무 불공평하다. 99점을 받은 학생이나 79점을 받은 학생이나 똑같이 4학점을 받는데 선생님의 입장에선 그 두 학생의 실력을 비교해보면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상대적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으로 평가를 해보아도 두 학생이 같은 최고의 4학점을 받는다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태국의 공립학교에서 가장 좋아 보인 점은 학생들의 비경쟁적인 구도였다. 그러나 두 해째 이곳에 있어보니 경쟁하지 않는 구도의 이면에는 어쩌면 이미 존재하는 벽을 서로 인정하고 넘지 않으려고 하는 소심함과 자포자기, 그리고 적당한 타협을 인정하는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행복한 학교'가 태국 교육부의 슬로건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이곳의 학생들은 아무도 그들에게 공부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최소한 낙제를 하지 않고 웬만하면 학교를 졸업할 수 있으니 걱정이 없어 보인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절대 경쟁 상대가 될 수 없는 학생들이 시험시간에 답안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면 조금도 망설임 없이 답안을 보여준다. 답안을 보는 아이들은 답안을 보여주는 아이들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벽이 이미 존재하고 있고 보여주는 아이들은 다른 세상의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선의를 베푸는 것으로써 자신의 덕을 더 쌓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답을 보는 아이들은 양심적으로(^^) 답을 보여주는 학생과 똑같은 답안을 만들지 않는다. 말 그대로라면 태국 교육부의 교육 정책은 성공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본 학생들은 얄팍한 순간적인 행복이란 핑계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조차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수업에 오지 않고 시험도 제대로 치르지 않았는데 성적을 받는다면 그들이 과연 공부를 해야 할 이유를 스스로 찾을 수 있을까? 이것은 계획된 방임에 가깝다.
나는 줄곧 이곳에서 학생들은 최소한 동등하다고 생각해 왔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 확신은 학교에서 신축하고 있던 새 건물의 완성과 함께 깨졌다. 부장 선생님은 내가 온 첫 해에 새 건물이 완성되면 한국어 교실을 주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막상 올해 다시 와보니 한국어 전공반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교실을 배정받지 못했다. 그 건물은 MEP 프로그램 학생들과 소수의 특별한 학생들의 차지가 되었다. 거기까진 그나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난 MEP프로그램이 좀 더 공부에 집중하는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학생들이 배구를 하고 핸드볼을 하고 미술을 하는 것처럼 좀 더 공부를 잘하고 공부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지불하는 수업료가 보통 학생들과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 등록할 수 있는 자격은 성적도 아니고 영어에 대한 자질도 아니고(물론 형식적으로 시험을 보지만) 매 학기 일반 학생의 8~9배에 달하는 등록금을 낼 수 있으면 된다. 일종의 영어 몰입 교육 프로그램의 축소판인 이 프로그램은 과학과 수학 수업 중 일부 시간을 영어로 진행한다. 그리고 그들에겐 그들이 부담하는 '돈'만큼의 차별화된 환경이 주어진다. 억지로 쟁취해낸 한국어 교실의 경우(물론 친동물적인 환경이라는 점에서 많은 한국에 있는 지인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는 했지만) 교실에 아예 거주하는 새들과 자주 드나드는 개들의 배설물이 뒹구는 환경은 그렇다 치고 프로젝터도 마이크도 없이 수업을 해야 한다. 소나기라도 내릴라치면 내 목소리로는 수업이 불가능해 하염없이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반면 MEP 학생들을 위해선 새 건물이 지어졌고 최신 시설을 갖춘 교실이 주어졌을 뿐 아니라 그 교실은 매우 위생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같은 학교 내에서 어떤 학생들은 최신 건물에서 깨끗하고 현대적인 화장실을 이용하는 반면 어떤 학생들은 새들이 집을 짓는 교실에서 너덜너덜해진 책상과 의자에 앉아 수업을 듣는다. 어떤 교실에선 선생님들이 최신 멀티미디어를 이용해 수업을 하고 어떤 교실에선 수업이 끝나면 온몸에 분필가루를 뒤집어쓰고 나오기 일쑤다.
이 정도면 이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벽' 정도가 아니고 '계급'이다.
나는 나쁜 선생님이다. 거의 혼을 내지 않는 태쌤들에 비하면 나는 자주 혼을 낸다. 수업시간에 밥을 먹어도 혼내고 거울을 봐도 혼낸다. 휴대전화를 보는 건 절대 금지다. 수업은 항상 정시에 시작한다. 늦게 오는 학생들을 기다리지 않는다. 기준에 미달이면 0점도 마다하지 않는다. 엑스트라 과제는 그냥 얼렁뚱땅할 수 있는 것으로 주지 않는다. 다 따라갈 수 없더라도 최소한 다음 학기 공부를 이어갈 수 있는 수준의 과제를 요구한다. 공부할 의지를 보여주면 끌고 가겠다는 나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태쌤의 말에 따르면 가난하고 돌보아줄 사람이 없는 학생들의 처지를 전혀 배려하지 않는 몹시 나쁜 선생님인 것이다.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말이 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 문장이 품고 있는 다른 의미는 알면 알수록 좋은 점만 있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알게 되면 이해하게 되고 이해하면 상대를 위한 자신만의 해결방법을 찾게 되며 결국 그 과정 전체를 통해 대상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방학인데 떠나지 못하고 '화'를 가슴에 품은 채 보낸 일주일은 끔찍했지만 난 나의 해결방법을 찾은 것 같다. 나는 계속 나쁜 선생님이 될 것이다. 난 학생들이 그 시기에 배워야 할 최소한의 삶의 자세나 방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늙고 고약한 선생님이다. 공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더라도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과정과 자세를 통해 아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다양한 방법과 요령을 배운다고 생각한다. 다음 학기는 좀 더 치열해질 것이다.
얻는 것도 없이 괜히 분노하고 화내거나 불평하는 대신 내 방식으로 다시 학생들을 독려하고 다그칠 힘을 비축하기 위해 남은 방학은 플럼빌리지의 명상센터에서 보내야겠다. '화'는 다스리되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두려움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선생님이 될 것이다.
안녕, 롬싹, 2주 후에 다시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