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 지방을 지나고 있다는 태풍 '파북'의 영향인지 오늘은 한낮이 되어도 해가 없다. 어쩌면 오늘 하루 종일 이런 날씨가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슬슬 콩밭으로 가고 있다. 내일이 마감인 원고는 비록 아직 무엇을 써야 할지도 정하지 못했지만 태국에 살면서 처음으로 맞는 이런 '걷기'좋은 날씨를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을 다잡아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모자를 꾹 눌러쓰며 '편집자님 미안합니다. 혹시 동네 한 바퀴라도 돌다 보면 쓸 거리가 생각날 수도 있고, 게다가 아침 일찍 마실 나간 우리 우쭈가 아직 안 돌아와서 제가 신경이 좀 쓰이네요. 조금만 걷다 돌아오겠습니다.' 마음속으로 조곤조곤 메시지를 남기고 집을 나서고야 말았다.
나의 동네 산책에 규칙은 없지만 집을 나서면 일상적으로 꼭 들르는 곳들이 있다. 그 첫 번째 코스는 아무래도 커피집이다. 오늘같이 시원한 날엔 따뜻한 커피가 좋지만 대부분 무더운 이곳에선 시원한 커피 한 잔 들고 길을 나서야 안심이 된다. 집을 나서고 오른쪽 길로 20m쯤 걸으면 동네의 메인 로드인 와지길 Soi Wajee을 만나게 된다. 거기서 우회전해서 다시 20m쯤 걷다가 길을 건너면 바로 폰의 작은 커피 오두막이다. 이곳이 내가 거의 매일 들르는 동네 커피집이다. 오두막이라는 표현을 쓴 건 '쏨 마이'라는 이름처럼 그곳이 정말 작은 오두막이기 때문이다. 폰('비'라는 의미)이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상냥한 주인장은 그녀의 집 앞에 작은 간이 오두막을 짓고 커피를 판다. 이곳 사람들 중 자영업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폰처럼 집 앞에서 장사를 하거나 아니면 집의 1층에서 장사를 하고 2,3층에서 거주를 하는 형태로 일을 한다. 일단 출퇴근 이동시간이 없는 삶이란 것만으로도 숨 쉴 틈이 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하다. 하긴 자영업자들뿐만 아니라 공무원이나 선생님, 은행원 등 이곳에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퇴근이라는 스트레스는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 것이다. 왜냐하면 경찰이나 공무원, 선생님의 경우 어디든 근무지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집이 무상으로 제공된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도 롬싹이 고향이 아닌 모든 선생님들에게 원하면 집을 제공해 준다. 버스로 30여 분이 걸리는 페차분에 사는 선생님들도 학교 바로 옆에 있는 교사용 숙소에서 생활하고 주말에만 집에 돌아갈 정도이다. 롬싹이 고향인 동료 임 Yim 선생님은 차로 1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서 부모님과 함께 산다. 가끔 그녀는 아침에 교통체증 때문에 짜증이 난다고, 학교까지 무려 15분이 걸렸다고 투덜대기도 한다. 롬싹은 그런 곳이다.
어쨌든 나는 거의 매일 아침 폰의 커피 집에 들러 '아메리카노 론, 마이 싸이 남딴'이나 '카푸 옌, 메이 완'을 주문한다. '마이 싸이 남딴'이나 '메이 완'이라는 표현은 모두 설탕을 넣지 말라는 표현이다. 폰의 커피집은 동네에서 인기가 꽤 좋아서 그녀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한다. 물론 벌이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하루에 몇 잔이나 파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데 얼추 계산해도 신입 선생님의 월급의 서너 배는 버는 듯했다. 그녀는 태국 북부 지역에서 재배된 커피 빈을 사용하는데 맛이 좋다고 입소문이 나서 그녀의 커피 빈만 사러 오는 다른 카페의 주인장들도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같으면 그 커피 빈을 어느 회사에서 취급하는지 알아내어 따로 주문을 할 텐데 여기 사람들은 그냥 그녀에게서 빈을 산다. 폰은 자기가 구입한 가격보다는 조금이라도 돈을 올려 받을 테고 거의 모든 커피 집의 커피 가격은 같은 수준이니까, 폰에게서 빈을 사는 카페 사장님들은 아마 그녀보다는 돈을 덜 벌 것이다. 돈을 덜 벌지만 어쨌든 돈을 버니 그것 역시 중요하지 않다. 롬싹은 그런 곳이다. 돈은 없어도 다들 땅을 가지고 있고 덕분에 가게 세를 내면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으니 마음이 대부분 여유롭다. 적게 벌면 적게 쓰고 많이 버는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다.
산들산들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커피를 들고 시내 쪽으로 250m쯤 다시 걸어 내려가다 보면 나의 단골 식당인 참 키친 Charm Kitchen이 있다. 집에서 바로 걸으면 5분도 걸리지 않는 곳이다. 조용하며 깨끗하고 편안한 이런 식당이 오토바이도 차도 없는 내가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건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다. 실제 내가 이곳에서 살아남게 된 결정적인 이유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곳의 셰프이자 오너인 완('달콤하다'라는 의미의 이름)은 나를 위해서 채식 메뉴를 만들기 시작했고 지금은 김치와 두부를 이용한 한국식 채식 메뉴까지 개발해 판매 중이다. 우연하게도 우리 학교에 새로 부임하는 영어 원어민 선생님들도 대부분 채식주의자들이었고 완의 식당은 점점 손님들이 많아졌다.
오늘은 두부가 떨어져서 먹고 싶던 구운 두부 샐러드를 주문할 수 없어 늦은 점심으로 비건 튀김을 시켰다. 비건 튀김은 버섯과 감자튀김을 샐러드와 함께 내는 음식이다. 맛있게 거의 다 먹었는데 샐러드 야채인 로메인에 잘 씻기지 않은 흙이 남아 있는 걸 발견했다. 한국에서라면 몹시 흥분해 큰 소리로 매니저를 찾으며 법석을 떨고도 남을 만한 일인데 놀랍게도 나는 '헉'하고 조금 놀랐을 뿐. 그리고 조용히 그 흙이 묻은 로메인을 먹지 않고 남겼을 뿐이다.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아, 오늘 손님이 좀 많더라. 아마 씻긴 했을 거야. 꼼꼼히 씻지 못했을 뿐. 어쩌겠어. 이미 다 먹어버렸는걸.'
서울에서 늘 싸움닭 같았던 나의 모습을 생각해볼 때 매우 놀라운 일이다. 롬싹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곳이다.
식당은 아름다운 정원과 세련된 인테리어 덕분에 사진 촬영을 위해서 방문하는 손님들이 꽤 있다. 오늘은 우리 학교 4학년(한국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 여학생들을 만났다. 곱게 화장한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는데 뚝가따('인형'이라는 뜻의 이름)가 인사를 해서 학생들인걸 알게 됐다.
뚝가따는 작년에 한국어를 공부했다. 머리는 좋지만 열심히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마르고 큰 키에 귀여운 외모, 패션에 관심이 많은 학생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못 본 사이 키는 더 커서 176cm나 되었다. 학교 밖에서 학생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아서 난 뚝가따와 PJ를 만난 게 무척이나 반가웠다. PJ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은 학생이지만 한국어 수업을 듣지는 않았었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이어서 평소에는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영어로 좀 나눌 수 있었다. 얌전하고 우등생인 PJ는 오히려 춤추고 노래하는 일이나 스타일리스트 같은 일을 하고 싶다고 했고 모델이나 배우가 어울릴 것 같은 뚝가따는 의사나 엔지니어가 꿈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미 빅토리아 시크릿 에이전트에게 캐스팅이 된 적도 있어서 기회가 되면 모델을 해보고 싶다고도 한다.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다. 이렇게 막연하나마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무엇을 꿈꾸어도 좋을 나이에 아무것도 꿈꾸지 못한다는 건 비극이다.
참에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하고 밥도 먹고 느긋이 나서서 계속 걸었다. 와지길을 따라 걸으면 시계탑이 있는 동네의 중심가로 연결이 된다. 참을 나서서 5분쯤 걸으면 롬싹 우체국을 지나게 된다. 태국의 우편 시스템은 매우 빠르고 친절하다. 어쩌면 손님들이 많지 않고 한가하기 때문에 친절할 수 있나...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지만 언젠가 방콕의 시암 스퀘어 근처에 있는 매우 붐비는 우체국을 가 본 후로는 그냥 태국의 우체국 직원들은 모두 친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개인적으론 우체국 패키지 디자인도 매우 맘에 든다. 하얀 박스에 하얀 실로 묶인 박스를 받으면 왠지 행복해진다. 박스들은 따로 테이프를 사용하지 않아도 간단히 접는 선을 따라 맞추어 접기만 하면 형태를 잡아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아주 쉽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태국의 공공 디자인에는 사용자를 배려하는 입장이 많이 반영되어 있다.
이왕 나선 김에 시장에 들러 당근을 사고 싶었다. 식사는 거의 밖에서 해결하는 편이지만 며칠 전 운 좋게 김밥 김을 살 수 있었고 여기저기서 김밥을 만들 수 있을 만한 재료들을 조금씩 샀다. 당근만 있으면 그럴듯한 모양새의 김밥을 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실 아침부터 마음이 무척 설레었다. 시장에 가려면 시계탑이 있는 로터리를 지나야 한다. 그냥 이 길로 쭉 직진하면 된다. 거의 모든 것이 와지길 위에 있다. 이곳에는 나처럼 걷는 사람이 없다. 날씨 때문인지 사람들은 가까운 거리도 걷는 법이 없고 모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다. 나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걸어 다니는 사람이다. 사실 사람들은 내가 걷는 것도 가만두질 않는다. 집을 나서기가 무섭게 뒤에서 '크루 메이'를 외치며 다가와 태워주겠다고 '어디를 가느냐'라고 묻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길 건너편 시청 앞에서 나처럼 걷는 사람을 발견했다. 맞다. 스님들도 걸어 다닌다. 롬싹에서는 크루 메이와 스님들이 걸어 다닌다.
뭐니 뭐니 해도 태국은 동물의 천국이다. 거리를 걷다 보면 사람보다 더 자주 부딪히는 것이 개나 고양이다. 뉴스를 보니 태풍으로 고립된 남부 지역의 주민들이 대피를 해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한 할아버지가 다른 어떤 것도 챙기지 않고(심지어는 자신이 입을 겉옷도 챙기지 않고) 키우는 고양이를 따뜻한 담요로 감싸 소중하게 안고 대피하는 사진이 보도되었다. 그렇다. 여기는 그런 곳이다. 모든 생명을 소중하게 여기는 곳. 소수지만 어떤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는 큰 개들과 고양이를 불편해하기도 하지만 난 왠지 자신들의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있는 듯 동네 편의점 앞에 늘어져 자고 있는 당당한 이 녀석들이 좋다. 편의점 문이 열릴 때마다 에어컨이 켜진 안쪽의 시원한 공기가 밖으로 나와서 이 녀석들은 이렇게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편안한 오수를 즐길 수 있다.
그래도 겨울이라고 요즘은 해가 일찍 진다. 시장에서 당근 하나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로티가 맛있는 베이커리에 앉아 오늘의 산책기를 정리하고 있다. 이 베이커리는 메인 와지길에서 갈라진 뒷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변의 많은 바 bar들과 함께 소사이어티 101이라는 공간을 구성하는 가게 중 하나이다. 롬싹에서 베트남어 선생님인 릴리와 함께 처음 가 본 바도 이곳에 있다. 릴리는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롬싹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늘에서 보내 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롬싹에서의 초반 나의 삶에 가장 중요한 정서적인 도움을 준 사람이다. 베트남에서 5년이 넘게 거주했던 나와 베트남 사람인 릴리는 롬싹이라는 낯선 곳에서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최대의 마음을 나누었던 것 같다. 릴리는 나보다 1년 먼저 이곳에서 선생님을 시작했고 그동안 자신이 알아낸 소중한 생존 정보들, 이를테면 근무 첫날부터 한동안 늘 아침밥을 사 가지고 와 나누어 주었고 세탁을 해주는 아주머니의 소개,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파는 집, 조용한 카페, 가까운 마트에 가는 법, 사무실의 권력서열이나 분위기 등등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처음 마땅한 이동 수단이 전혀 없었던 나는 학교 선생님들 회식에 갔다 돌아오던 어느 날 밤, 늘 그렇듯이 그녀의 오토바이 뒤, 그녀의 등 뒤에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 밤하늘의 별을 보며 잊고 있었던 진정한 행복감을 느꼈다. 누군가의 뒤에 앉을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을 온전히 믿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나는 이제 그렇게 되었다. 힘들면 도움을 청해도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고 어떤 사람들은 청하지 않아도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남의 어려움을 인지하고 먼저 손을 내밀며 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곤 임, 베스트, 애비, 토레, 마토이, 뺑... 이곳에 앉아 있으면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떠난 뒤에도 누군가 나를 이렇게 떠올려줄까?
롬싹의 겨울 하늘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잘 갈린 땡모반(태국식 수박 주스) 색처럼 말갛게 핑크 핑크 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염치없이 이렇게 어슬렁어슬렁 게으르게 돌아다닌 반나절 산보 이야기를 원고로 보낼 야무진 생각을 품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