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의혹과 음모와 의심으로 가득했던 지난 학기를 정리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극도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을 찾던 차에 플럼 빌리지를 알게 되었다. 방콕에서 차로 두 시간여를 달리면 카오 야이 Khao Yai라는 큰 산이 있는 팍총Pak Chong지역이 나온다. 카오 야이에는 하이킹 코스가 잘 관리되고 있는 국립공원이 있고 우수한 품질의 와인을 생산하는 아름다운 와이너리도 있다. (카오 야이에는 세 개의 와이너리가 있는데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방문을 할 독자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그랑 몬테 Gran Monte 와이너리를 추천한다.) 이 지역은 방콕에서 가깝기 때문에 방콕 사람들의 휴양지로도 인기가 높은 곳이라고 한다. 그곳에 플럼 빌리지가 있다. 플럼 빌리지는 '타이 Thay'로 존경받는 베트남의 팃낙한 Thich Nhat Hanh 스님이 설립한 수행 공동체로 프랑스 보르도 지역에 있는 플럼 빌리지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들어진 곳이고 현재 팃낙한 스님과 콩찬 스님이 모두 거주하고 있는 곳이다. (큰 스승인 팃낙한 스님은 2022년 1월 22일 95세로 세상을 떠나셨다.) 출발하기 전 팃낙한 스님이 벌써 구십을 넘기셨으니 살아 계실 때 혹시라도 뵐 수 있을까 하는 희망을 품었었는데 뵙지 못했고 아침 산책 중에 콩찬 스님을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 역시 당시 팔십오 세의 나이였지만 총기가 가득한 눈빛을 가지고 있었고 위트 있는 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순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플럼 빌리지는 'mindfulness'에 초점을 맞춘 수행 공동체이다. 일정 기간의 교육을 마치고 법사 Dharma teacher의 자격을 갖춘 선생님들과 교육과 훈련을 받고 있는 스님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하고 있고 나처럼 단기 방문을 통해 수행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수행 중인 대부분의 스님들이 베트남 사람들이기는 했지만 소수의 다른 언어권 스님들이 같이 있어서 그곳에서의 모든 프로그램은 베트남어와 영어 두 가지 언어로 제공이 된다. 나는 최소 훈련 기간인 일주일을 그곳에서 머물렀다.
베트남에서 태국으로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와 준 친구, 락Lok과 함께 호기심과 두려운 마음으로 도착한 첫날, 택시 기사는 우리를 플럼 빌리지 입구에 내려주고 돌아가 버렸다. 나는 도착하면 분명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어떤 종류의 안내문이나 혹은 프로그램을 위해 들어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는 안내자(?)를 찾을 수 없어 몹시 당황했다. 사실 찾아오는 방법까지는 안내가 되었지만 그 이후로 어떠한 안내도 받지 못해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상당히 접근이 용이한 방식으로 낯선 곳에 발을 디딘 우리들을 맞아주는 시스템이 있을 것이라고 내 맘대로 믿고 있었는데 말이다. 볕은 따가웠고 무작정 걸어서 뭔가 물을 곳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일만큼 그곳은 조용했다.
'이거, 도대체 뭐지? 들어오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흠, 너무 불친절하군.'
작은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도 불편한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터덜터덜 걷다 곧 지치고 말았다.
'그래, 전화라도 해보자.'
마지막으로 받은 이메일에 적혀 있던 번호를 찾아내 통화를 시도했다. 인내심을 시험하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다렸고 늦게 전화를 받은 사람은 그 시간은 모두가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므로 조용히 그냥 직진해서 들어오면 오른쪽으로 2층 건물이 보일 테니 들어가 쉬고 있으라고 말하고는 되물을 여유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 뭐야 이거. 도대체 어딜 기준으로 직진을 하라는 거야? 내가 어디 있는지 묻지도 않고 말이야.'
화가 치밀어 오르려는 순간 초록 초록한 풍경이 거짓말처럼 눈에 들어오고 나무에 매달아 놓은 풍경이 바람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에잇, 모르겠다. 그냥 저기 앉아 쉬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풍경이 매달린 나무 밑에 앉아 비현실적인 아름다운 소리와 바람과 빛을 느끼며 잠시 앉아 있었다. 멀리 보이는 큰 돌에 적힌 "Happiness is here and now"라는 글자가 클로즈업된 것처럼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래, 지금 여기를 즐기자.'
삶에 꼭 안내와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한참을 나무 아래 앉아 쉬고 있자니 멀리 스님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락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가 스님께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물었다.
숙소는 여성 숙소와 남성 숙소로 분리되어 있다. 친구와 헤어져 숙소에 들어섰지만 여기서도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30여 분을 기다리자 숙소 앞에 밴이 한 대 섰고 다양한 국적의 여자들 한 무리가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방콕의 공항과 버스 터미널에서 플럼 빌리지로 오는 밴을 예약해서 온 사람들로 태국, 베트남, 미국, 폴란드, 대만, 노르웨이,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 예상한 대로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같은 밴을 타고 방콕에서 오는 두 시간 여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하고 서로 어느 정도 친해진 듯 보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30여 분을 더 어색한 웃음을 띤 채로 영문도 모르고 앉아 있어야만 했다. 마침내 매우 불친절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던 방식으로 각자 배정받은 숙소에 들어갔고 나는 일단 샤워실과 화장실을 체크했다. 사실 이런 단체 생활은 거의 해본 적이 없어서 아마 락과 팟이 아니었다면 이런 체험을 시도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려와는 달리 숙소도 화장실도 소박하지만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단지, 그곳에는 어디에도 거울이 없었다. 많이 당황스러웠으나 다음 날부터 바로 거울이 그곳에서의 일상에 전혀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플럼 빌리지에서의 하루는 새벽 4시 30분 기상으로 시작된다. 거울이 없는 욕실에서 세수와 샤워를 하고 5시부터 시작되는 '앉기 명상 sitting meditation'에 참여한 뒤 5시 30분부터 '걷기 명상 walking meditation'을 한다. 처음엔 앉기 명상도 어려웠지만 걷기 명상은 생각보다 더 어려웠다. 매우 천천히 호흡에 집중하며 자연을 최대한 가깝게 느끼며 걷는 훈련이었는데 보통 한 시간 정도를 걸었던 것 같다. 걷는 동안 매일매일 해가 뜨는 것을 보았다. 하루 일과가 이렇게 시작되다 보니 삶의 일부분이었던 '화장'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새벽 4시 30분에 풀 메이크업을 장착하고 나서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우습다. 하지만 내가 아무리 화장이라는 걸 대충 하는 사람이어도 나이 때문에 완전한 민낯에 대한 부담을 떨쳐 버리기는 쉽지 않았는데 주변에 화장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그것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거울이 전혀 없는 곳에서의 일주일 동안 '나'를 볼 수는 없었지만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타인'을 바라보며 내 모습도 그들과 다르지 않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자주, 거울 속에 '나'는 내가 아닐 수가 있는 법이다.
7번 작은 벙커 침대가 플럼 빌리지에서 보낸 일주일 동안 나의 공간이었다. 좁은 침대 하나가 내가 가진 공간의 전부였으나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으니 어쩌면 나는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너무 많이 가지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나는 작은 나의 7번 침대가 몹시 그립다.
플럼 빌리지의 생활은 매우 단순하다. 아침 일찍 일과를 시작하지만 중간중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개별적인 시간이 많으며 일찍 잠자리에 든다. 밤 10시에는 숙소 내 모든 불을 꺼야 하고 소등 후 시작되는 '침묵 명상 silent meditation'은 다음 날 아침 걷기 명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잠깐의 휴식 시간 후 이어지는 아침 식사 시간에도 침묵 명상은 이어진다. 아침 7시에 시작되는 아침 식사를 비롯한 모든 식사는 '침묵 식사 silent dining'로 진행되고 100% 비건 식으로 제공된다. 사실 플럼 빌리지에서의 생활이 다 좋았지만 여기에서 제공된 식사는 정말 맛이 좋았다. 식사 때마다 직접 재배한 신선한 채소와 과일, 두부와 올리브, 너트 류로 이루어진 다양한 메뉴가 제공되는데 맛뿐 아니라 영양적으로도 손색이 없게 고려되어 단 일주일 만에 나의 소화기관이 엄청나게 좋아지는 걸 경험할 수 있었다. 말을 하지 않고 식사를 하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말을 하지 않고 음식을 천천히 씹자 내가 먹는 음식 하나하나의 씹는 소리와 식감에 집중이 되고 그 음식을 위해 농사를 지은 사람들의 노고과 음식을 만든 사람들의 땀을 생각하게 된다는 걸 깨달았다. 플럼 빌리지에서의 아름답고 고요한 식사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플럼 빌리지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낭만적이기도 했다. 가끔은 걷기 명상 중에 잔디밭에 앉아 앉기 명상을 하기도 했다. 캄캄한 새벽에 나가 명상을 하다 보면 환하게 해가 뜨고 자연과 물아일체가 되는 듯한 감동을 느끼기도 했다. 침묵 식사 명상도 좋지만 일주일 동안 두서너 번은 '소풍 식사 picnic dining'라고 음식을 들고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이야기하며 밥을 먹는 시간도 있고 달이 밝은 밤이면 몇몇 스님들의 주도하에 달구경을 하며 차와 담소를 나누는 티파티가 번개로 진행되기도 했다. 교육 중인 스님들은 영어 이외에도 태국어와 프랑스어를 배우는데 이곳 스님들 사이에서 한국어의 인기가 대단해서 한국어 교사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몇몇 스님들은 나를 발견하면 다가와 정말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고 맑고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부탁을 하기도 했다.
플럼 빌리지에서 우리는 모두 자유로웠다. 나중에 서로 이야기를 해보니 사실 처음 한 3일 정도는 모두가 '이게 맞는 건가? 여기 좀 이상하지?'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도무지 안내라는 것이 없다. 달랑 숙소 내에 있는 흑판에 하루 일정을 적어 놓는 것이 다인데 그 일정마저 수도 없이 변경이 된다. 게다가 여성 숙소를 관리하면서 소모임을 이끄는 '자매 sister'는 베트남인 자원봉사자인데 노래 실력이 형편없어서 모임을 시작하면서 갖는 싱어롱 시간에 음정도 박자도 맞지 않는 노래를 부르면서 해맑게 웃는다. 내가 만난 베트남 수행자들은 대부분 플럼 빌리지가 처음이 아니고 여러 번 방문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로 스스로 알아서 그 안에서의 생활을 척척 해낸다. 반면에 영어 사용자 모임에 속한 우리들은 대부분 처음 경험이어서 일정이 바뀌기라도 하면 엉뚱한 곳에 가서 혼자 기다리고 있거나 아예 프로그램을 놓치는 일도 발생했다. 게다가 우리는 불교적 베이스가 약하거나 없는 사람들이었다. 종교 자체가 의미를 갖는 수행 체험은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우리는 질문이 많았고 논리적인 대답을 원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대답에 슬슬 짜증을 내는 사람들도 생기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바로 '나눔 sharing'의 시간이었다. 남자 숙소에 있는 아름다운 차방 tea room에서 (나중에 왜 남자 숙소에만 차를 마실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과 정원이 있느냐를 놓고 또 한바탕 논쟁이 벌어지기는 했었다.) 진행된 나눔의 시간은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걱정, 아픔을 내어 놓는 시간이 되었고 그 짐을 내려놓은 후 우리는 모두 거짓말처럼 자유로워졌다. 내어놓고 나눔으로 그 짐이 없어졌다기보다는 아마도 그 짐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게 됨으로써 자유로워졌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일주일 동안 모두 세 번의 나눔의 시간이 있었다. 조금은 서먹서먹한 첫 번째 나눔의 시간, 우리의 서먹함을 풀어준 것은 필리핀에서 온 데이브가 내려준 향 좋은 차였다. 필리핀 보홀 근처 작은 섬에서 환경운동가로 살고 있는 그는 선뜻 내어놓기 어려운 그의 지극히 사적인 문제를 공유했고 자진해서 차를 내리고 서빙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녹여줬다. 나눔의 시간은 마지막으로 갈수록 더 깊고 솔직한 시간이 되었다.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 방황하는 독일에서 온 17살 소년도 대만에서 온 요기 에이프릴도 그리고 나도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사람들처럼 시를 짓고 낭독하고 마음을 나누며 존재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걱정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맞는가 보다.
어느새 12월이다. 늘 이맘때면 한 장 남은 달력을 바라보며 복잡한 마음이 되곤 한다. 물론 여기서 달력이라 함은 심리적 달력을 말한다. 물리적 달력은 생활 속에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복잡한 마음'이라고 하지만 사계절이 뚜렷한 한국의 매서운 겨울에 맞이하는 한 해의 마지막과 덥거나 더 덥거나, 비가 오거나 건조한 계절만이 존재하는 이곳에서의 한 해의 마지막은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춥고 우중충한 날씨엔 왠지 더 비장해져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반면 여전히 30도를 훌쩍 넘는 더위에, 해가 그야말로 '쨍쨍'한 날엔 한 해의 마지막이라느니 새해 계획이라느니 하는 것들을 생각하는 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여겨진다. 우선 크리스마스가 휴일이 아닌 이곳에서 크리스마스에 수업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참 낯설다. 작년에 경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해지지 않는 사실. 크리스마스가 며칠이냐고 묻는 질문이 우문으로 들릴만큼 상식인 곳이 있는가 하면 이곳 아이들은 그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는 아이들이 드물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에 전혀 중요하지 않은 날이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필터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이곳의 아이들은 자신의 필터에 꽤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것은 그만큼 새로운 것에 닫혀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어떨 땐 그들의 작은 세계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또 어떨 땐 작지만 그 안에서 충분히 행복한, 그들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감탄스럽기도 하다. 어찌 생각하면 내가 지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없어도 되는 것들 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플럼 빌리지에서 보낸 시간들이 꿈결처럼 느껴진다. 일상은 일상이지만 할 수 있다면 지금 내가 내 삶의 필터로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한번쯤은 의심을 해 봐도 좋겠다. 볕이 짱짱한 혹서의 12월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