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emi Oct 12. 2022

한국어 교원은 무엇으로 사는가

"고맙습니다. 내 맘속에 저장, 다음 년에 공부를 열심히 할 거예요."


방콕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뒤 작년 나의 애제자 중 한 명이었던 학생이 보내온 어색하기 짝이 없는 한국어 메시지가 담긴 사진을 보며 만감이 교차했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가르치며 내가 얻는 가장 큰 교훈은 아마도 겸허함일 것이다. 그전엔 내가 사용하는 외국어가 해당 언어의 원어민에게 어떻게 들릴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땐 나도 사전에 의지해 만든 어설픈 문장으로 대화를 시도해보기도 했었다. 사실 저 정도의 문장이면 한국인 원어민이 그 내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며 발화자는 나름 요즘 가장 핫한 표현과 미래와 의지를 담은 문법을 알맞게 사용해 문장을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지 한 단어를 잘못 사용했을 뿐인데 듣는 원어민에겐 몹시 어색하게 들리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어를 배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자신감을 가지고 말문을 먼저 틔우는 것이라고 하지만 나에게 언어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란 매우 두렵고 조심스러운 일이다.   

학기를 마치고  M5학생들이작성한 롤링페이퍼와 내가 없는 사이 사무실 내 책상에 학생이 적어 두고 간 사랑스러운 문장. 맞다. 태국에서 까올리 선생님은 학생들의 사랑으로 살아간다.


태국 공립학교의 한국어 교육 열풍? 그 실상은?

올해는 롬싹 비타야콤 Lomsak Wittayakhom 학교에 한국어 전공이 생겼다. 전공반이 생기면 우선 주 당 6~8시간의 수업이 가능하기 때문에 작년처럼  기역, 니은을 간신히 떼고 "이름이 뭐예요?"나 하던 수준에서 벗어난 대화를 할 수 있는 학생이 생길 확률이 높다. 게다가 작년에 주 당 1시간 수업만으로도 뛰어난 성취도와 실력을 보여준 3학년 홀수반 학생들 중 전공반을 지원한 학생들이 있다면 어쩌면 기역, 나은을 다시 가르치지 않아도 될 수 있다는 소박한 꿈도 품어 보았다. 한국어 선생님으로서 한글 자모를 가르치는 일은 매우 당연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태국 공립학교의 한국어 선생님들 사이에는 전공반이 개설되지 않은 곳에서 무려 4년간 한글 자모만 가르치던 선생님이 5년 차에 다시 그런 상황의 학교로 발령받고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얼굴도 모르는 선생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태국의 중등교육과정은 6년제로 운영되며 우리 학제로 고등학교 1학년에 해당하는 마테욤 4가 되면 한국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듯이 전공과목을 결정한다. 전공은 수학/과학, 사회, 외국어, 운동과 미술, 음악 등 다양하게 세분화되어 선택할 수 있다. 작년까지 우리 학교에는 외국어 전공에 중국어반만 있었는데 올해는 일본어와 한국어반이 추가되었다. 태국 대학 입시를 위해 치러야 하는 시험 중에 하나인 PAT 과목에 2017년 처음으로 한국어가 추가되었고 첫 시험임에도 불구하고 전체 외국어 과목 지원자 중에 10%에 해당하는 5천 여명이 넘는 학생들이 응시했다고 한다. 또한 많은 태국의 대학들이 인문대 입시에 한국어 성적을 반영한다는 발표가 있었다니 학교의 이런 결정은 비단 '까올리' 선생인 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한국어 전공반의 개설은 시작부터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한국 언론에서 태국 대학 입시에 한국어가 포함되었으며 태국 내에서 한국어의 인기가 치솟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 롬싹에서는 한국어 전공을 원하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을 전달받고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다 연예인병에라도 걸리겠다 싶을 만큼 많은 학생들이 한국어 선생님인 나에게 보내온 인사들과 작년 한국어 교양반을 선택하는 시간에 물밀 듯이 달려와 나를 당황하게 만든 그 아이들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왜 그들은 한국어 전공 선택하기를 주저하는 것인가?

새 학기가 시작되고 제2외국어 과목의 수강신청 날의 풍경. 신청 방법은 무조건 선착순이다. 진행 선생님의 '시작'이라는 구령과 함께 학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온다. 사진 속 소녀들은 3학년이 된 짝수반 친구들이다.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방탄소년단이나 워너원 오빠들이 보내 준 학생들이다. :) 


현실은 이렇다. K-pop을 비롯한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로 무조건적으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 하는 많은 학생들이 있지만 학생들의 부모들은 아직 한국어를 공부하고, 전공하고 난 뒤의 그들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학생들이 한국어를 전공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테욤 1부터 3학년까지는 한 반에 40명에 이르도록 학생들이 넘쳐나고 4학년부터는 그렇지 않았던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 아무런 고민 없이 해맑게만 보인 학생들이지만 누군가는 그들의 미래를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여기에서 더 슬픈 한 가지 현실은 위에서 말한 이유들로 인해 한국어 전공반에 올 수밖에 없는 학생들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과학/수학 전공이나 중국어 전공을 택하는 학생들에 비해 낮다는 것이다. 태국에서 미래의 직업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은 의사와 변호사다. 그래서 수학/과학 전공반은 경쟁률이 높고 학생들 중 가장 성적이 높은 순으로 선발한다. 외국어 전공에서는 단연 중국어의 경쟁률이 가장 높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광대한 중국 시장은 중국어를 할 수 있으면 훨씬 많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중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의 숫자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원하는 전공반에 가지 못한 학생들의 대부분이 차선책으로 선택하는 것이 일본어와 한국어다. 그래서 우리 반 학생 16명 중에서 정말 한국어를 하고 싶어서 온 학생은 단 한 명뿐이었다. 그 학생은 성적도 우수해 과학/수학 전공반에 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을 설득해서 한국어 반에 온 매우 특별한 케이스이다. 

물론 지역마다 환경과 경제적 차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점이 있으니 다른 지역도 우리와 같은 상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방콕이나 치앙마이 등 일부 대도시에 한국어 교원이 파견된 것은 7,8년의 역사가 있으니 지역 사회에서의 한국어에 대한 인지도와 호감도가 높을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대도시가 아닌 곳의 상황은 거의 비슷해 보인다. 

한국어 전공반이 생기면서 갖게 된 전공 교실이다. 오래 비워두고 청소도 하지 않은 상태의 교실이 너무 처참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런, 몹쓸 카메라의 성능이라니!’ 사진 속 교실은 소박하지만 예뻐 보인다. 현실은 프로젝터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에 낡은 나무 책상과 의자들, 그리고 뚫린 천장과 지붕 사이에 집을 짓고 사는 새들 덕에 새똥으로 지저분해진 교실 바닥이 전부다. 전공 수업 첫 시간은 이렇게 다 함께 청소를 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우리 교실이 너무 친환경적인 반면 성적이 우수하고 등록금을 다른 학생들보다 많이 내는 학생들을 위한 영어 MEP 프로그램의 교실은 최첨단 시설을 갖추고 있다. 한국어가 현재 학생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현실적인 한국어 학습자에 대한 대우나 학교의 지원은 영어나 중국어 학습자에 비해 현저하게 떨어진다.


그렇다면 미래는?

지난 금요일, 학교는 일본어와 한국어 전공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별 프레젠테이션을 마련했다. 핏사눌룩 Phitsanulok의 나레수안 Naresuan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선배가 한국어 전공의 경험과 좋은 점을 공유하는 발표였다. 학교 입장에서는 원했던 전공이 아닌 한국어 전공반에 오게 된 학생들의 기운을 북돋아주고 부모님을 안심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어떤 학교는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간담회를 열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적이 있다. 선배 학생의 발표는 첫 장부터 철자 오류가 있는 상태로 시작되었다. (기회가 된다면 태국 대학의 한국어 전공 학생들의 실력 문제에 대해서도 다루고 싶다.) 발표는 부산 동서대학교 교환학생 경험을 시작으로 한국의 음식, 학생문화 등의 이야기로 이어졌다. 발표의 막바지에 선배는 자신은 아직 학생이지만 아모레 퍼시픽 사의 마케팅 아르바이트로 한 달에 40,000밧 (한화 악 130여 만원)을 벌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했고 학생들은 크게 술렁거렸다. 40,000밧이라는 돈을 태국 현지 교사의 급여와 비교하면 거의 교장 선생님 급의 급여로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벌기에는 큰 돈이었다. 그날 발표가 끝나고 일본어 전공반의 학생 3명이 한국어로 그들의 전공을 바꾼 걸 보면 그 선배의 발표가 효과가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행사를 기획한 영어 MEP 프로그램의 띡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집에 가서 부모님을 지속적으로 설득하고 이해하게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등학교에서 한국어 전공을 했다고 해서 반드시 대학에서 한국어를 전공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이 학부모들은 고등학교에서의 한국어 전공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6학년이 된 선데이는 교양반 한국어 학생 모집 안내문 위에 너무 어려우니 지원하지 말라는 글을 써 놓았다. 속마음은 5학년 때 같이 공부한 학생들끼리만 공부를 하면 자모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지루한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2년간 한국어 수업을 들으면서 매번 신규로 지원하는 다른 학생들 때문에 자모음부터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했기 때문에 학교에서의 한국어 수업은 이미 그에겐 의미가 없는 시간이 되었다.


태국 대학에 한국어 전공이 개설된 학교는 2017년 기준으로 11개, 부전공으로 개설된 학교는 3개 대학이며, 이 중 쭐라롱껀 Chulalongkorn 대학에는 석사과정이 개설되어 있다. 실제로 언론과 한국 교육부는 한국어 교육 보급과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의 숫자에만 집중해 온 경향이 있는데 현지에서 체감하는 분위기는 이제 뭔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해마다 많은 수의 한국어 전공 학생들이 배출되고 있지만 그들이 전공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곳은 태국 내에서 매우 적다. 바로 이웃한 나라인 베트남과 비교해보더라도 베트남에는 우리나라 대기업을 비롯해 많은 수의 중소기업들이 진출해 있고 한국어를 할 수 있는 현지인들의 채용이 빈번한 편이다. 상대적으로 태국에 진출한 한국의 기업 수는 적고 현지 직원의 고용률도 낮다. 전공을 원하는 학생이 적은데 PAT 시험 응시율이 높은 이유는 PAT 한국어 시험의 수준이 굳이 전공을 하지 않은 학생도 꾸준히 교양으로 개설된 한국어 교육을 받았다면 충분히 치를 수 있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육부는 방탄소년단과 워너원에게 표창장이라도 줘야 할 판이다. 팝송과 할리우드 영화,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오타쿠적인 캐릭터, 샹송과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 등의 문화적 키워드들이 해당 언어의 관심을 불러일으켜 왔으며 우리 역시 K-pop과 드라마 등의 대중문화로 한국어를 교육사업으로 확대시킬 수 있을 만큼의 기회를 갖게 되었다. 태국의 경우와 같은 공립학교 파견 사업은 해마다 다른 나라로 확대되고 있으며 한국의 대학들은 지금 어학당으로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외국인 학생들에 의해 유지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제는 단순히 한국 대중문화의 인기에 기대어 한국어 학습자들의 숫자를 불리기만 하는 것이 아닌 한국어 교육 모형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든다. 외국어로서의 한국어 교육에는 어떤 장기적인 계획과 비전이 있을까? 나는 한국어 교원으로 일한 지난 3년간 그것에 대해서는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태국 학생들에게 부모님의 생각에 반하면서까지 한국어를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하기가 어렵다. 


한국어 교원으로서

영어나 중국어의 위상은 말할 필요가 없고 태국에서 일본어 학습의 역사 역시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올해 한국어가 PAT 시험에 채택되면서 응시생 수에서 일본어는 한국어에 밀려 5번째를 기록했지만 전반적인 일본어에 대한 태국 사람들의 호감도가 줄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지금 태국에서 일하는 한국어 교원들은 열악한 환경과 박봉에도 등 떠밀리듯이 주어진 '민간 외교관'이라는 별칭에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태국 학생들의 입장에서도 그들은 부모님들의 반대를 무릅쓰면서 한국어를 공부한다.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기댈 데가 없다. 우리는 그나마 '오빠'들에 대한 애정과 '오빠'들의 나라에서 온 선생님에게 베푸는 태국 소녀들의 사랑으로 이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나는 한국어 교원으로서 한국어 프로그램이 태국 학생들의 삶에 더 많은 기회를 줄 수 있는 비전을 가졌다는 점으로 자부심을 갖고 싶다. 학생들의 맹목적인 사랑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길고 단단한 안목으로 기획된 프로그램에 대한 자부심으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 언제까지 '오빠'들의 인기에 기대어 한국어를 K-pop과 드라마에 얹어 선생님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떡볶이를 만들면서 팔아야 한단 말인가. 



이전 07화 푸탑벅과 단사이에서_결국 내가 문제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