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진절머리 나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정규직 사회복지사로 전환이 되고 본격적인 사회복지사의 삶이 시작되었다. 계약직일 때 담당했던 사업단과는 다른 사업단을 맡게 되었고, 역시나 어린 사회복지사라는 이유로 초반에는 무시를 당하기 일쑤였다. 어린 사회복지사와의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큰 소리를 치는 그들을 보며 오히려 매일매일 마음을 비워나갔다. 이미 돌봄 사업단에서 겪어본 경험이 있기에 2번째부터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고, 오히려 바쁘게 돌아가는 하루 속에서 그들과의 기싸움은 부질없고 의미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덧 자활이라는 업무에 익숙해진 내 모습을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때쯤, 어마어마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이전 담당자 때부터 온갖 민원과 인격모독, 인신공격 등을 서슴지 않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의 다음 타깃이 내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센터 공용 메일로 매일 새벽, 장문의 메일을 보내는 것은 기본이었고, 새벽에 전화나 장문의 문자, 통화할 때 폭언과 인신공격을 하는 것도 기본이었다. 심지어 통화할 때는 자기 할 말만 하고 일방적으로 끊어버리기까지 했으니. 그 답답함을 말로 표현할 길조차 없었다. 담당자로서 누군가를 편애하거나 불편해하는 감정을 가지고 싶진 않았지만, 그 주민은 불편함을 넘어서서 불쾌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본인만 생각했고, 함께 일하는 사업단의 다른 동료들에 대한 배려는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럴싸한 말들로 다수를 위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본인을 위한 말들만 늘어놓아 함께 일하던 사업단의 동료들도 모두 그분에게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분은 툭하면 거짓말로 남을 속이기 바빴고, 얼마 가지 않아 그 거짓말들은 모두 들통이 났다. 그리고 그때마다 오히려 본인이 더 화를 내곤 했다. 원칙을 무시하고 다른 동료들을 무시하고, 거짓말을 해가며 그 사람은 산재를 신청해 버렸다. 그리고 잠수를 탔다. 기가 막힌 상황에 담당자인 나는 물론 함께 일하던 사업단의 동료 주민들도 불같이 화를 냈다. 한 사업단을 쑥대밭을 만들어놓고 잠수를 타버린 그 주민은 결국 사업단이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종결 처리되었고, 제대로 된 매듭은 짓지 못했지만 나 역시 그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았지만 내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한 일들은 없었고, 적응한 일을 충실히 진행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넘어가고, 2022년이 되었을 때는 퇴사를 생각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새롭게 담당하게 된 사업단 주민들은 타 사업단들에 비해 비교적 젊은 나이 층의 주민들로 구성되었는데, 문제는 이 분들의 책임감의 문제였다. 비록 국가사업으로 인해 이루어진 사업단일지언정 본인의 근무지이고 엄연한 근로자라면 자신의 일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감이 있었어야 했는데, 이 분들은 책임감이 없었고 늘 회피하기 바빴다. 어느 날은 근무를 하다 고객에게 큰 실수를 하고 말았는데, 그 누구도 그 사태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도 지지 않으려 했고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바빴다. 사업단의 담당자였던 나는 우선 사고를 수습해야 했기에 고객의 연락처를 전달받아 직접 통화 후, 만나 뵙고 사과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행히 고객 분들은 나의 사과에 마음을 풀고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말씀해 주셨으나 그저 책임을 회피하기 바쁜 그들의 모습에, 또 적반하장으로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하는 그들의 모습에 분노하며 소송까지 걸겠다고 한 사건이었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자활센터는 근로능력이 있는 조건부 수급자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기 때문에 소송까지 가게 된다면 사업단 주민들의 삶은 불안정 해질 것이 눈에 선했으며, 소송까지 간다고 하더라도 주민들의 과실이 100%였기에 이길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든 소송만은 막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담당자로서 총대를 메고 고객들을 만나 다시 한번 설득하여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배상하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게 되었다. 소송의 고비를 넘겼다는 기쁨도 잠시, 고객들이 집으로 돌아간 후 사업단 주민들의 불만이 뒤를 이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사과를 시키세요?', '제가 아니라 OO이가 그랬는데요?', '이건 OO이가 사과해야지 저희가 왜 단체로 사과를 해야 하는지 전 이해를 못 하겠어요.' 어안이 벙벙했다. 저들이 지금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자기들이 하는 말의 무게를 알고 저러는 걸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멍한 상태도 잠시, 계속되는 불만에 나도 모르게 참고 있던 그 무언가가 터져 나와 그들에게 냉정하게 쏟아냈다. '한 사업단에서 일을 하고 있고, 한 공간에서 같이 근무하고 있던 상황에서 사고가 발생했으면 구성원이 함께 사과를 해야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다들 회피만 하는 것이냐. 하다 못해 가만히라도 있던가 왜 자꾸 인정하지 않고 변명만 해서 고객을 더 화나게 만드냐. 소송하겠다는 거 막겠다고 내가 무슨 짓까지 한 줄 아느냐.' 등 한 번 터지기 시작한 감정은 쉽게 가라앉질 않았다. 내가 그들의 담당자이기에, 그들의 안정된 삶을 지켜주기 위해 소송만은 막아야겠어서 고개를 숙여 고객에게 내 온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고객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한참을 설명했고, 배상 방안에 대해 얘기하고, 같은 실수가 재발하지 않도록 담당자로서 더 신경 쓰겠다며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그들은 감사하게도 나의 사과를 받아주었고, 소송은 하지 않겠다고 해주었다. 내가 어떻게 막았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기들에게 사과를 시켜 서운하다며 온갖 짜증을 내는 사업단 주민들의 모습에 환멸감이 느껴졌다. 내가 왜 이들을 위해 계속 이 일을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시점이었다.
그러던 중 3월 경에 코로나에 걸려버렸다. 코로나 때는 아프긴 했어도 재택근무를 못 할 정도는 아니었어서 재택근무로라도 일을 하겠다고 했으나 실장님과 센터장님은 푹 쉬라며 걱정 말라고 하셨고, 그 말에 불편하긴 하지만 일주일간 자가격리를 하며 쉬다 재출근을 하게 되었다. 그러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4월 경에는 운동을 하다가 디스크가 터져 갑작스럽게 수술을 하게 되었고, 1개월 병가를 내게 되었다. 병가를 준비하고 결재를 받기까지 시간이 꽤 걸리기도 했고, 병가가 승인이 날지 안 날지 미지수였기에 다른 동료들에게는 먼저 밝히지 못하고 실장님과 소통을 하며 병가 준비를 이어가고 있을 때쯤부터 한 동료 분에게서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게 되었다. 묘하게 나를 배제한다거나, 내 말에 대답하지 않는 등 나를 없는 사람처럼 대하는 태도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엔 오해겠거니, 내가 예민해서 잘못 생각한 거겠거니 싶어 넘어가려 했으나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불편해한다는 느낌에 확신이 생기기 시작했다. 찝찝한 기분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싫었고, 오해가 있다면 풀고 싶었다. 그래서 대화를 요청했다. 둘이서 대화를 하기 위해 회의실로 들어갔고, '저한테 요즘 화나신 일 있으세요?'라는 내 말에 동료 분은 버럭 화를 내기 시작했다. 이유인즉슨, '코로나 때도 그렇고 디스크 때도 그렇고 못 나오게 되면 미리 말을 하고 양해를 구해야지 다짜고짜 그렇게 병가 들어간다고 하면 다냐'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했다. 이해하지 못할 부분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대로 억울했다. 코로나 때는 재택근무라도 하겠다고 했으나 실장님과 센터장님이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 말렸고, 디스크로 인한 병가는 지자체 승인을 함께 받아야 했기에 이게 최종적으로 승인이 날지 안 날지 확신이 없어 동료들에게 공개하지 못한 것이 컸다. 실제로 결재도 올리기 전이었기에 내가 먼저 왈가왈부 떠들고 다닐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나의 입장을 밝히고 동료의 입장을 들으며 좋은 방향으로 오해를 풀어가긴 했지만, 우리의 사이는 이전처럼 돌아갈 수는 없었다. 나도 그 동료 분도 불편하긴 매한가지였을 테니.
이후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 진절머리가 나버린 나는 디스크 수술 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여 결국 이런저런 사족을 붙여 퇴사를 결정했다. 물론 가끔 이 결정을 후회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지금껏 다닌 직장들 중에선 가장 인간다운 회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는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끝없이 믿음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배신감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내가 100만큼 주었다고 해서 그들로부터 100만큼 받길 원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내가 100만큼 믿어주었다면 1만큼의 행동력이나 책임감을 보여주었으면 했는데, 나와 함께 한 그들은 그러질 못 했다. 처음에는 내게 이런 감정을 심어준 그들을 미워하고 원망했다. 그다음엔 분노하고 체념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다시 한번 믿음을 불어넣어주고 희망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그 끝은 또다시 배신이었다. 더는 이 굴레 속에서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그게 내가 사회복지를 그만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