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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태 Jun 20. 2020

13년간 자기 계발을 해온 중년 남자가 정의하는 "청춘



나는 올해로 자기 계발을 시작한 지 13년째다.
딱 꼬집어 언제부터라고 명확히 날짜를 특정할 수는 없지만 2008년 봄으로 기억하는 어느 날 나는 자기 계발을 결심하고 관련된 공부를 시작했다.

시작은 누구나 비슷하듯 자기 계발서를 읽는 것에서 시작했다. 사실 그때는 “자기 계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학창 시절을 끝내고 직장인이 되면서 나는 그동안 내 머릿속에 쌓았던 지식과 눈칫밥 그리고 탐구능력으로 남은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회사원이 된다는 것은 “그토록 지긋지긋한 시험에서 벗어나 이제는 더 이상 책을 보지 않아도 되는 진짜 어른의 세상에 합류하기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대학생 때도 1년 정도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일 년에 딱 4주(1학기 중간/기말, 2학기 중간/기말) 공부하는 아주 저렴한 대학생이었지만 말이다.

공부와는 거리가 먼 내가 다시 “자기 계발”이라는 아주 모호하고 정성적인 공부를 시작하겠다고 결심을 한 것이다.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지난 글이 답이 되었을 거라 생각한다. ( https://brunch.co.kr/@maniac292929/118 )



나는 불명확했지만 일단 책을 열심히 읽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변의 선배들이 자기 계발은 직장인들이 하는 공부라고 알려줬다. 직장인의 공부는 돈 되는 걸 찾는 것이고 그 시작은 재테크라고 말했다. 그렇게 선배들은 내게 재테크 서적을 읽으라고 말했다.

2008년 그때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시작되기 얼마 전이었다. 폭락 직전의 찰나였기에 주식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나는 주식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항선이 어떻고, 기술적 반등이 어떻고, 세력이 매집을 한다느니...  그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얘기들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풀어댔다. 사람들이 얘기하는 “xx도사” 같은 이야기를 나는 귓등으로 들었다. 새롭게 주식에 참여하게 된 동료들은 열심히 주식통장을 만들었고, 자기들만 안다는 일급 정보를 서로에게 공유했다. 옆 사람은 하루 만에 한 달치 월급을 벌기도 했고, 또 그 옆의 사람은 한 달치 월급을 잃기도 했다. 가장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이 난 선배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진짜 돈을 많이 벌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주식의 시대에서 <필론의 돼지>처럼 내 할 짓을 하며 뭔지 모를 나를 계발하겠다고 이것저것 건드려보고 있었다.

외국어 공부를 통해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갖춰볼까? 생각했지만 그 당시 내 영어는 들어줄만했기에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나는 당장 써먹을 지식을 머릿속에 채우는 것보다 내 생각이 좀 더 풍요로워졌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서점을 들를 때마다 이런저런 관심 가는 책들을 사서 모았다. 다시는 공부라는 것을 하지 않을 것 같았는데, 나는 다시 공부를 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해오던 비디오 게임을 끊었다. 정말 큰 결심이었다. 위기감보다는 제대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서른셋 나는 청춘의 길로 한 발씩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청춘(靑春)

참 가슴 설레는 단어다. 명확히 잡히지는 않지만 느낌만으로도 젊고 힘이 넘치고 파랗고 싱그럽다.
당신은 청춘을 어떤 의미로 알고 있는가? 아니 청춘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어떤 느낌인가?

사전을 찾아보았다.

청춘 (靑春) : 한창 젊고 건강한 나이 또는 그런 시절을 봄철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

청춘은 봄이며 젊음의 상징이다. 보통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을 청춘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순전히 나이에 의한 것이다. 어떤 자료를 찾아보아도 명확히 지정되는 나이가 없고, 명확히 정의된 그 어떤 것도 없다. 그저 청춘이라는 젊음의 상징은 자신 혹은 타인이 어렴풋이 느끼게 되는 순간의 감각이다. 다시 말해 서로 간에 풍기는 느낌으로 우리는 나 혹은 당신이 청춘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나는 나의 10대와 20대에 나 자신이 청춘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육체적으로는 그 시기에 터질 것 같은 욕망의 분화구 같은 열정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내 자아가 정의하고 있던 저돌적인 도전과 의지의 표상 같은 청춘을 그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고등학교 문학시간에 선생님께서 읊조리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에서 느끼던 그 역동과 떨림을 나는 서른을 한참 넘긴 나이에 서서히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학생에서 직장인으로 바뀌고, 나이를 먹고,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족이 생기고, 가장이 되고, 직급이 높아지고, 주름살이 늘면서 점점 내가 사그라들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직장에서 해야 할 공부는 학창 시절의 것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었다. 누군가의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내가 직접 손과 머리로 문제를 풀고, 답을 구하면서 나는 사그라지지 않고 점점 불을 피워가고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자기 계발을 진행하면서 나는 다른 여러 사람들의 그것과 달리 나 자신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들이 주식을 공부할 때 나는 역사책과 위인전을 읽었고, 그들이 영어 공부를 할 때 나는 논어와 도덕경 같은 고전을 읽었다. 명확히 앞을 내다보고 걸어가는 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마냥 쓸모없지만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다행인 것은 책의 양이 늘면서 내 생각은 조금씩 젊어졌고, 어떤 시점에서 나는 나 스스로 “청춘”이라는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시기가 30대 후반이었다....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내 청춘의 터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다.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생각하면 착각이겠지만, 그만큼 나는 내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나에게 후하게 점수를 줘본다. 이게 내 장점이자 전략이다.


2주 전 사내 방송 촬영을 했는데, 그 방송이 지난 수요일에 방송되었다. 사내 방송이지만 방송의 힘은 컸다. 많은 선후배들이 나를 알아봐 줬고 칭찬해주었다.
내가 내 방송을 모니터링했을 때, 나는 내가 나이가 들었음을 보게 되었다. 생각은 젊고, 행동도 젊고, 희망도 젊다고 생각했는데 TV 속에 있는 나는 제법 나이가 든 중년의 남자였다.

실망한 것이 아니다. 나이를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나이를 먹는 만큼 그만큼 더 멋있어지면 된다.
20대의 숀 코넬리보다 70대의 그가 훨씬 더 섹시해 보이고, 30대의 조지 클루니보다 50대의 그가 훨씬 더 잰틀 해 보이지 않는가?

그들 역시 나이를 넘어 자신의 생각 속에서는 여전히 현역일 테고, 그 아우라가 얼굴과 몸과 삶에 비치는 것이리라.

나도 내 얼굴이 내 행동이 내 말이 정확히 나를 비춰주는 사람으로 완성되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무거운 눈꺼풀을 껌뻑이며 이렇게 글에 집착하는 것이다.



- 브런치 작가 김경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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