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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마닐 Dec 06. 2020

혈연이나 성애가 아닌 우정만으로도

Part3. 함께 더 잘 사는 미래를 꿈꾸며


살고 싶은 집


 건축학과 1학년 커리큘럼에 '건축 제도'라는 수업이 있다. 2학년부터 5학년까지 필수로 듣는 '건축 설계'의 선행 과정으로, 학생들은 이 수업을 통해 손으로 도면을 그리는 방법을 배운다. 수업을 진행하신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했다. 왜 건축학과에 왔냐고. 성적에 맞춰 왔다는 몇몇 학생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대답이 둘 중 하나였다.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러브하우스'를 보고 왔거나, 자신만의 집을 짓고 싶어서 왔거나. 나는 그중 후자였다.


 나는 꿈이 확고하지만 매해 새롭게 갱신되는 타입이다. 스스로 주택을 디자인해 짓고 싶다는 꿈은 나를 건축학과로 이끌었지만, 그때의 드림하우스와 지금의 드림하우스는 정말 다르다. 책을 모으는 것에 관심이 있던 대학교 1학년의 나는 둥근 모양의 거대한 서재가 있는 주택을 꿈꿨다. 30대가 된 지금의 나는 비혼 여성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집을 꿈꾼다. 비혼 여성 건축가로서 꿈꾸는 집에 대해 조금의 묘사를 풀어보고자 한다.


 1층에는 필로티 주차장과 함께 카페 겸 바가 영업하고 있을 것이다. 낮에는 평범한 카페지만, 저녁에는 입주민들의 오픈 키친이 된다. 퇴근을 마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할 사람들이 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카페 사장님은 입주민 중 한 명이다. 안심하고 들를 수 있는 이 공간 덕분에 주변 건물에도 많은 비혼 여성들이 입주했다.


 2층은 공유 오피스다. 각자 분야의 전문직인 입주민들은 건물 밖 회사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공유 오피스로 출근하는 사람들도 있다. 높은 층고로 최고의 영감을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지정된 좌석은 없지만 곳곳에 커다란 모니터와 노트북 거치대가 있어 각자 원하는 자리에서 그 날의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점심은 1층에서 간단히 해결하기도 하고, 집에서 먹고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서로 다른 분야의 일을 하고 있기에 언제고 서로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동업이라기보다는 외주의 개념이다.


 3층과 4층은 주거 공간이다. 비혼 여성들이 함께 더불어 살기를 원하지만 그게 꼭 한 집에 붙어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각자가 편안하게 생각하는 거리는 저마다 다르다. 자신만의 방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아파트 옆 동 정도가 적당한 사람도 있다. 또, 마주 잡는 손과 맞대고 누운 온기가 필요한 사람도 있다. 룸메와 아는 딱 테이블을 사이에 둔 거리, 그리고 벙커 베드의 매트리스만큼의 거리가 가장 편안한 사람들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각자의 라이프스타일을 존중하여 최소 1인실에서 3인실까지 구성할 계획이다. 각 호실에는 세탁기, 주방, 화장실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 어느 한가한 일요일 오전에는 누군가의 거실에 모여 함께 티타임을 가지며 새로 알게 된 음악을 공유하기도 한다. 시간이 맞는 넷이서 코스트코에 다녀와 각자 먹을 양만큼의 음식을 소분한다. 함께 살기에 주거비에 대한 부담도 덜하다.


 옥상에는 커다란 차양이 드리워져 있다. 이 곳에서 운동을 하거나 여유롭게 햇살을 즐긴다. 계단실에서 나오는 캐노피에는 골조에 연결한 샌드백이 하나 매달려 있다. 언제든지 글러브를 끼고 복서로 변신할 수 있는 공간이다. 금요일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가 열리기도 한다. 우리만의 자그마한 캠핑장이다. 화로에 불을 붙이고 양갈비를 굽는다. 맥주잔을 부딪치며 최근에 겪은 재미있는 일화를 나눈다. 상상만 해도 행복한 공간이다.


 입주민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까지 놀러 와 집과 동네를 마음에 들어해서 그 옆에 또 다른 비혼 여성 공동주거가 생기는 미래를 상상한다. 그렇게 한 집 두 집 늘어나다 보면 어느새 그 거리는 비혼 여성들로 가득 찬 안전한 거리가 될 것이다. 안전한 거리가 모여 한 마을 전체가 우리들로 가득하기를 소망한다. 대한민국에서 짧은 머리 여성이 제일 많은 마을. 밤늦게 혼자 거리를 걸어도 안전한 마을. 테라스 앞에 앉아 맥주 한 잔해도 위아래로 훑는 남성의 시선이 없는 마을. 모든 여성이 진실로 자유로우며 인간으로서 존중받는 마을 말이다.






혈연이나 성애가 아닌 우정만으로도


 부부 관계에 대해 흔히 하는 말 중에, '이제는 의리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애정과 사랑으로 만났지만, 신혼이라는 기간이 지남과 동시에 우정과 동업의 관계로 변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 사랑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점차 서로를 이성이 아닌 사람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결국은 우정과 의리로 살 관계라면 그 시작이 꼭 사랑이어야 하나, 라는 당연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몇 번의 이성애 연애를 반복하는 동안 늘 답답한 부분이 있었다. 콩알만 한 방에서 시작한 룸메와 나의 관계는 단 한 번의 언쟁도 없이 대화와 타협과 우정으로 탄탄하게 흘러왔는데, 왜 이성만 만나면 이성이 집을 나가는 것일까? 희망 함량 75%, 행복 함량 25%의 콩깍지로 시작한 새로운 연애는 늘 재고 따지는 그들의 행동과 가부장제에 절어 나를 '이겨먹으려고' 하는 맨스 플레인과 가스 라이팅으로 막을 내렸다. 언젠간 룸메와 같은 관계의 남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연애 10년 경력의 서른 살이 되자 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그제야 정신이 든 것이다. 룸메와 같은 남자를 찾을 것이 아니라, 룸메와 함께 평생 살면 되는 것이었다.


 늘 짝으로 붙어 다니는 애정과 증오, 이 중 증오는 거르고 애정으로만 가득한 관계를 만드는 것, 그것이 신뢰로 가득한 우정의 힘이다. 우리의 관계는 달달하지 않고 찐득하지 않다. 어찌 보면 건조하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그 건조함으로 단단한 관계다. 그래, 이를테면 황토벽돌로 지은 집 같은 관계 말이다. 덕분에 견고하고 따뜻하고 보송하다.


 혈연 혹은 성애적인 관계로만 해석되는 가족이라는 개념을, 굳이 이성이나 혈육끼리가 아니어도 함께 어우러져 재미나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다는 것을 우리 둘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싶다. 우리는 아주 잘 살고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다. 결혼하지 않고서도, 친구와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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