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할 정도로 근육이 많은 직장인
80kg라고요?
키 172센티미터에 몸무게 80kg. 오랜만에 찾은 병원에서 신장체중 측정기에 올라가니 뜬 숫자였다. 몸무게를 확인한 간호사는 놀란 눈으로 날 위아래로 쳐다보며 “몸무게 잘못 나온 거 아니에요? 얼굴은 조막만 한데 80킬로라고??”하고 외쳤다. 양심적으로 말하건대, 내 얼굴은 조막만 하다는 묘사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몸무게는 틀리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보기보다 몸무게가 10킬로는 더 나가는 몸이었다. 흔히들 비만의 척도로 이야기하는 60kg은 이미 중학생 때 넘어서 다시는 그 밑을 본 적이 없다. 친구들이 중고등학생 때 살을 뺀다고 밥을 덜어낼 때 나는 외쳤다. “얘들아 몸무게는 복구가 되지만 키는 복구되지 않아!”
밥을 잘 먹은 덕분인지, 축복받은 유전자 덕분인지 고등학교 3학년 때 168cm였던 키는 대학교 때 요가 수업을 들으며 171cm까지 컸고, 30대가 된 지금 또다시 1cm가 커졌다. 친구들은 키가 크니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재 몸무게인 80kg는 30대 여성 BMI 기준 비만이다. BMI는 근골격량을 고려하지 않는다. 80kg 중 31kg는 근골격량이고, 25kg는 체지방량이다. 뼈도 두꺼운 편이다. 20대 내내 >자를 그리던 인바디 그래프는 서른에 허리 부상을 입으며 I자로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괄호 ( 모양을 그리긴 했지만, 여전히 평균보다 근육이 많은 몸이다.
모든 걸 다 이길 거야, 몸무게까지도
2남 1녀 중 1녀로 태어났다. 괄괄하게 큰 덕분에 어머니는 1남 2녀를 낳은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살 터울인 오빠에게는 그 무엇도 지고 싶지 않았다. 오빠를 이겨먹고 어떻게든 인정을 받고 싶었다. 뭐, 흔한 K-딸의 서사다. 오빠를 이기고 싶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책도 많이 읽고, 태권도 학원도 같이 다니고, 수영도 열심히 하고, 아무튼 제 나름대로 치열하게 사는 어린이였다. 이기고 싶었던 것 중엔 심지어 몸무게도 있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것에 대한 수치와 두려움은 학습되는 것이고, 그땐 전혀 학습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엄마가 어떤 반찬이라도 하면 전투적으로 먹었다. 여섯 살 어린 남동생까지 있으니 제때 밥그릇을 챙기지 않으면 내 몫은 남아있지 않았다. 잠시 내가 몸무게가 오빠보다 많이 나갔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비슷한 키의 삼 남매 중에 제일 덜 나가지만.
20살, 근손실은 나의 것
30대 중반이 지금이야 몸무게가 얼마나 나가든, 종아리가 어떻게 생겼든 별로 신경 쓰지 않지 않게 되었지만, 20대는 외모에 대한 강박이 가장 심하던 시기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열심히 운동해서 만들어둔 근육을 어떻게든 빼려고 고민했다. 20살에는 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술을 많이 마시는 방법으로 근손실을 유도했다. 그 결과 오빠보다 두꺼웠던 팔뚝은 거의 2/3 사이즈로 줄었고, 허벅지 또한 얇아졌다. 몸무게는 60kg대 초반이었다. 엄마는 내가 살을 많이 뺐다며 좋아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깝다. 그 근육! 만들기도 힘들었는데 대체 왜 부끄러워하고 맘에 안 들어했던 걸까?
내가 20살이었던 2009년은 걸그룹 소녀시대의 스키니진이 전국을 강타한 때였다. 지금이야 통이 크고 편안한 바지가 대세지만(그 위에 크롭 티니 언더붑이니 하는 짤막한 옷을 입는 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실용성이지만), 그때는 옷가게에 가면 바지 코너에는 무조건 스판끼가 있는 스키니진만 주르륵 걸려있었다. 날씬해 보이기 위해 하체에 꼭 붙는 바지를 입고, 또 그 다리가 길어 보이기 위해 8cm의 하이힐이나 상대적으로 ‘편하다’는 12cm의 웨지힐 샌들을 신었다. 몸에 딱 붙는 옷을 입으면 자연스레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적나라하게 보게 된다. 높은 굽의 신발로 인해 인위적으로 꺾인 몸이 더 보기 좋다고 모두가 말하고, 그래서 낮은 신발 신은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몸에 딱 붙는 비슷한 디자인의 옷을 입으면 비교하고 비교당하기 더욱 쉽다. 몸의 기능이나 건강보다는 타인에게 보이는 모습에 대한 비교다. 늘 그 비교의 상위에는 소녀시대의 빼빼 마른 몸이 있었기에, 결국 모두가 스스로의 몸에 만족할 수 없는 늪이었다. 심지어는 소녀시대조차 서로 비교하고 비교당했다.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져 그렇게 나는 근육과 더불어 무릎 건강도 잃었다.
종아리 알 없는 여성의 몸에 대한 환상
살을 아무리 빼도, 술을 아무리 마셔도 어찌할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다리 근육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수많은 운동으로 단련된 탓에 내 종아리는 어떻게 보아도 다른 사람보다 부피가 컸다. 한때는 종아리 근육을 없애준다는 퇴축술도 고민해본 적 있을 정도였다. 고민이 들 때마다 해외 연예인들의 레드카펫 사진을 봤다. 계단을 오르는 드레스 사이로 뻗어 나오는 다리에는 근육이 붙어있었다. 내 다리 같은 왕고구마든, 앙증맞은 한쌍의 한입 고구마든, 어쨌든 모두의 종아리에는 근육이 붙어있다는 선명한 선과 굴곡이 드러나 있었다.
국내 연예인들의 사진에는 왜 종아리 근육이 보이지 않았을까? 모두가 매끈한 종아리를 동경하는 데는 여성 걸그룹들의 역할이 지대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는 그들이 종아리에 꾸준히 주사를 맞아 주사자국을 가리기 위해 메이크업까지 한다는 루머도 돌았다. 걸그룹뿐만 아니라 미디어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여성은 종아리에 ‘알’이 없었다. 그 비밀을 30살이 넘어서야 알 수 있었다. 머리에 뭐라도 맞은 듯 충격을 주었던 것은 바로 피겨 황제 김연아의 스포츠웨어 광고 보정 전후 사진이었다. 보정 전 종아리에 있었던 근육이 보정 후에는 사라져 매끈한 다리를 보여주고 있었다. 운동선수에게도 종아리 알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다니! 전 세계를 열광케 한 파워풀한 점프와 스핀을 하려면 바로 그 멋진 종아리 근육이 필수인데 말이다!
근육은 지방보다 무겁다
그 후 종아리 알 없는 여성의 몸이 한국의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성의 몸에는 근육이 있다. 그 근육을 부끄럽게 만든 것은 미디어다! 여성의 몸에는 근육이 있고, 근육은 무게가 나간다. 특히나 허벅지와 종아리는 우리 몸에서 부피가 큰 근육에 속한다. 내 몸을 이루는 80kg의 무게 중에 근골격량에 속하는 30kg, 그것의 일부가 바로 근육으로 꽉 찬 내 멋진 종아리였던 것이다. 종아리보다 두꺼운 허벅지야 말할 것도 없고.
남들보다 튼실한 다리로 나는 한강을 달리고, 빠르게 움직여 스쿼시 라켓을 휘두르고, 복싱 글러브가 상대방에게 닿도록 수없이 거리를 재고, 스쾃 자세에서 오래 버티고, 힘차게 물을 차며 앞으로 나아간다. 남들보다 많은 근육으로 회사를 다니면서 글을 쓰고 책도 내고, 친구들을 만나고, 주말에는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며, 3.5kg짜리 블랭킷을 뜨개로 만들고, 블랭킷보다 10키로는 무거운 케틀벨을 휘두르고, 무엇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여유롭고 친절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근육은 지방보다 무겁다. 운동으로 인해 허리둘레가 줄어들고 몸무게가 늘어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지방이 근육으로 바뀌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보기보다 몸무게가 많이 나간다는 것도 좋은 것이다. 평균보다 근육량이 많다는 뜻이다. 근육이 많으면 비슷한 신장의 사람들보다 무거워지고, 근육이 많으면 체력이 좋아진다.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에너지와,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나오는 삶의 여유는 바로 근육에서 비롯된다. 나는 80kg의 몸무게로 인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근육이 많은 직장인은 수상할 수밖에 없다. 집에 와서도 정신이 또랑또랑해서 누워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말에나 퇴근 후에 뭐든 더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근육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운동으로 근육량을 키워보자. 당신도 나와 함께 ‘수상할 정도로 근육이 많은 직장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다음 이야기 한줄 예고편
<지금껏 해온 스포츠로 자기소개서를 쓸 수 있는 직장인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