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되기 전에도 수상하긴 했지

수상한 직장인의 성장 과정

by 문마닐
수상한 직장인의 성장 과정

어렸을 때 오빠에게 지는 걸 정말, 정말로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오빠와 둘이 싸워서 아빠가 제대로 혼을 낸다며 효자손을 들고 쫓아오니 울면서 도망갔는데, 구석에 몰려서 코를 훌쩍거리면서도 “오빠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라는 걸 “요”를 붙이기 싫어서 “오빠 잘못했어”라고만 말하던 어린이였다. 고집도 세고, 지기도 싫어하는 어린이. 초등학교 때는 오빠를 태권도 학원에 보낸다길래 같이 다니고 싶다고 했다. 한 2년쯤 다니면서 2품을 땄었다. 그러고 나서는 또 오빠를 따라 검도장에 세 달쯤 다녔다. 오빠는 죽도를 사랑했지만 나는 싫어했다. 최초로 운동에 취향이 생긴 순간이었다.


중학생 때는 수영장에 다녔다. 오빠는 하다가 맘에 안 든다며 어푸어푸 단계에서 포기하고 잠영을 하다가 그만뒀다. 배운 지 3개월쯤 됐을 때 학교에서 수영 대회가 열렸다. 나는 자유형만 배운 상태로 대회에 나갔다가 1~2년 배운 친구들을 제치고 레인에서 1등을 했다. 태권도에서 키운 근력이 도움이 되었던 모양이다. 거기서 교육청 대회까지 나갔는데, 진짜 잘하는 친구들만 나왔는지 7명 중에 6등을 했다. 대회를 준비하며 심장이 터질 정도로 힘차게 움직이고 나면 기분이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날 선수로 키우는 건 어떻냐는 코치의 제안에 엄마는 ‘운동보다 공부가 쉽다’는 논리로 나를 설득했지만, 그래도 수영 다니는 걸 그만두지는 않았다.


꽤나 재미를 붙여서 엄마와 함께 2년 정도 다니며 접영까지 배웠다. 물살을 가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고 힘차게 손을 뻗어 공기를 들이마시는 접영은,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법이다. 차가운 물속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다가 레인 끝으로 나와 몸을 물 밖으로 드러내는 순간, 어깨에서 뜨거운 기운이 확 올라오는 그 감각도 너무 좋다. 여행이든 어디든 수영을 할 기회만 생기면 수영복을 챙겨나가서 물속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낼 줄 안다는 것은 꽤 멋진 일이다. 스위스에서는 호수 건너편의 알프스 산맥을 보며 뜨거운 노천탕을 헤엄쳤고,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속 호텔의 야외수영장에 누워 느리게 배영을 하며 하늘과 고층빌딩들을 내 위로 드리웠다. 수영을 할 줄 몰랐다면 엄두도 내지 않았을 일이다.




팔굽혀펴기, 0개에서 24개로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진로를 결정할 때가 왔다. 성적이 꽤 좋은 편이었지만 의대나 약대를 갈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일이 있던 것은 아니라, 제발 하나라도 걸려라 하며 가망도 없는 의대약대 수시 시험을 보러 다녔다. 그즈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군인이 된 친척을 만났다. 육사에서 성적이 좋으면 나랏돈으로 의대에 가서 군의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다. 워낙 운동을 이것저것 했으니 체력검정을 통과하는 것도 쉬울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일단 육사 1차 시험을 통과한 후에 체대입시학원에 등록했다. 체력검정에서 보는 항목은 다섯 가지다. 오래 달리기, 단거리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윗몸일으키기, 팔굽혀펴기. 오래 달리기는 정말 싫어하는 종목이었지만 어떻게든 페이스 조절을 해서 완주까지는 해낼 수 있었고, 단거리 달리기와 제자리멀리뛰기는 수영과 태권도로 키웠던 허벅지 근육이 많은 도움이 됐다. 윗몸일으키기도 학교 체력장에서 항상 만나는 종목이니 괜찮았다. 하지만 문제는 팔굽혀펴기였다. 학원에 등록한 첫날 나의 팔굽혀펴기 기록은 0개였다.


체대입시학원에 등록한 3개월간 주 5일 체육관에 가서 두 시간씩 운동을 했다. 땀이 어찌나 나던지 회색 티셔츠가 검은색이 될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면 스스로 티셔츠를 벗지 못해 팔을 들면 엄마가 마치 껍데기처럼 밑에서부터 위로 훌렁 벗겨줬다. 그리고는 샤워를 하고 독서실에 가서 비몽사몽 공부하다 집에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아침저녁으로 단백질을 챙겨주겠다며 닭 소 돼지를 구워주신 어머니 덕분에, 그리고 10대였기 때문에 근성장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체력검정 날, 나의 팔굽혀펴기 기록은 무려 24개였다.


입시 결과는 최종 합격이었다. 다만, 합격 소식을 들은 것이 입소 당일날이었다. 추가합격이었기 때문이다. 입소를 할 때 이미 2개 대학의 건축학과에 합격한 것을 알고 있었다. 육사 최초 불합격(대기자 명단) 소식을 듣고 이왕 사는 거 재밌게 살겠다며 정시 세 군데를 모두 뜬금없이 건축학과에 넣었기 때문이다. 당일 입대라니!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해 고민하다가, 일단 입소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지 5박 6일째 되던 날 퇴소해서 집에 돌아왔다. 군의관도 군인이고, 육사는 장교를 양성하는 기관이라는 것을 들어가서야 인지했었다. 저 멀리까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과 같은 발걸음으로 걷고 뛰는 것을, 나의 고유한 색깔이 탈색되는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인생의 일부도 아니고 전부를 군인으로 살 수는 없었다. 20살이 되던 해의 겨울, 진짜 ‘나’에 대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사실은, 내가 나만의 색깔로 사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운동은 나의 위로, 구원


육사를 뛰쳐나온 후 들은 얘기로는, 엄마가 합격 발표를 받기 전날 꿈을 꾸었단다. 누군가 반지를 줄듯이 보여주고는 끝내 주지는 않아서, 그래서 내가 돌아온 거라고 했다. 아버지는 친구들을 다 불러 이미 동네잔치를 한바탕 치렀단다. 그래서 건축학과 입학금과 첫 등록금을 내러 가는 날, 나는 불효녀 중의 불효녀였다. 엄마는 퇴소한 날부터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대학교 3학년이 될 때까지 “네가 육사를 갔다면 이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됐을 텐데”하는 푸념을 들었다. 그 소리를 듣기가 싫어 어떻게든 장학금을 타내려 발버둥 쳤다. 아참, 대학교 3학년 이후 그 잔소리를 듣지 않았던 건 그때 육사 내 성폭력 사건이 터져 온갖 신문에 도배됐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러한 사정으로 대학교 내내 생활비에 쪼들렸다. 등록금도 감지덕지였으니 용돈을 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엄마는 내가 밥도 직접 지어먹으면서 열심히 학교에 다닌다며 자랑스러워했지만, 친구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 외식할 때 거기에 끼지 못해 제일 싼 학관 밥을 먹고, 고시원에 살면서도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녀야 하는 나의 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도 교환학생은 부모님의 도움으로 갈 수 있었다. 해외에 나가서도 대부분의 시간을 설계실에 틀어박혀서 지내긴 했지만, 학교 수영장이 무료라 행복한 나날이었다. 교환학생을 다녀와서는 다시 쪼들리는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나마 4학년 2학기부터 룸메이트와 살기 시작하며 생활이 좀 나아졌다. 그때 학교 앞 요가학원을 등록해서 일 년쯤 다녔다. 그 힘으로 5학년 1학기 때(건축학과는 5년 제다) 졸업작품과 대기업 면접 준비와 건축기사 공부를 병행할 수 있었다. 보통 그중 하나만 해도 지치기 마련인데, 졸작은 마감일자를 무사히 지켰고, 대기업 인턴에 합격했고, 건축기사 필기시험도 통과했다.


대기업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넘어가는 것만큼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건설사에 여성으로 입사하기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낙타가 되는 것만 같다. 군대에 갔다가 복학해 비슷한 시기에 졸업하는 남자 선배들은 나보다 훨씬 낮은 학점과 토익점수, 스펙을 가지고도 대기업에 턱턱 합격하는데, 나는 서류와 면접에서 탈락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한 학기를 매진하고는 포기했다. 한두 해쯤 더 노력한다고 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나이만 먹고 그 어디에도 취업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떠도는 신세가 되는 것은 그때 당시 가장 큰 공포였다. 그 공포 속에서 시간을 보내니 마음이 심란하여 우울증이 정점을 찍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밀려오는 생각에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면 룸메이트가 일어나 물을 떠다 주고 달래주었다. 민폐를 계속 끼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해가 지면 밖으로 나가 한강을 따라 걸었다. 15킬로, 20킬로는 족히 되는 거리를 걸으며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차가운 밤바람과 잔잔하게 파도치는 소리, 그리고 도시의 불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은 우울증을 조금이라도 가라앉히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집에 오면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렇게 그 시간을 버텨내고 건축사사무소에 취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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