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친구와 남해 즐기기
서울에서 동네 친구를 한 명 태우고 두모마을로 돌아왔다. 동네 친구 현화 언니의 말에 따르면, 간밤에 내가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로그아웃 하듯이 기절했다고 한다. 8시간을 꼭 채우고 그중 4시간의 깊은 수면을 즐긴 후에 새벽에 눈을 떴다. 피곤해서 요가를 갈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었고, 좀 더 누워있고 싶었는데 다시 잠을 잘 만큼 졸리지는 않았다. 그래서 서울 친구네 집에서 빌려온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었다. 책을 빌려준 친구도 집에 큐레이션 하듯 책을 들이는 친구고, 예전에 즐겨 놀았던 술친구도 이 책이 인생책이라고 한 적이 있어 궁금했었다. 체코와 스위스의 도시에 여행 갔던 기억을 떠올리며 <안나 카레니나>를 옆구리에 끼고 걷는 테레자의 모습을 상상했다. 로맨스물을 꽤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방식으로 서술하는 책은 처음이라 제법 재밌게 읽었다. 이 책을 로맨스물이라 얘기하는 게 너무 납작한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랑은 다른 사람의 선의와 자비에 자신을 내던지고 싶다는 욕구였다. 마치 포로가 되려면 먼저 자신의 모든 무기를 내던져야 하는 군인처럼 타인에게 자신을 방기하고자 하는 욕구. 그리고 아무런 방어 수단이 없는 상태에서 그는 언제 공격당할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프란츠의 사랑이란 언제 공격이 올지 끊임없이 기다리는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pp.143-144. 밀란 쿤데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8.)
책을 읽다가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여덟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샤워를 하고 나와 언니에게 오늘 오전에 근무 스케줄에 대해 얘기하니, 노도를 들어갈지 고민한다. 노도에 들어가는 배는 여덟 시 반에 출발하는데! 눈도 못 뜬 언니한테 뱃시간 맞춰 태워다 줄 수 있다고 꼬셔서, 후다닥 짐을 싸게 만들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언니는 양말 신을 시간도 없이 뛰쳐나와 차에서 양말을 꿰어 신었다. 그렇게 동네 친구를 아침부터 노도로 유배 보내고 라운지로 향했다.
라운지에서는 인절미가 평상에 누워 눈을 감고 게으르게 몸단장을 하고 있었다. 유정 님, 린지 님에게 인사를 하고 잠깐 자리에 앉아 작업을 했다. 오늘은 열 시부터 출근이다. 서울에서는 출근 시간에 맞춰 회사에 가지만,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라운지를 이용하다가 출근 시간이 되면 각자 해야 할 일을 한다. 혹시나 출근에 늦을까 봐 애플워치로 알람을 설정해 두고 일하다가 시간에 맞춰 노트북을 정리했다.
열 시부터 열한 시까지 라운지의 커다란 창문을 청소하고, 체크아웃 시간인 열한 시부터는 객실 청소를 하기로 했다. 지난번에 라운지 폴딩도어를 한번 청소했더니 제법 노하우가 생겼다. 처음엔 베이킹소다를 따뜻한 물에 녹여서 분무기에 넣고 유리에 뿌려 때를 불린 뒤 스퀴저로 쭉 밀어내는 작업을 두 번 반복한다. 그다음에 종이를 구겨 얼룩을 닦아내다가, 닦이지 않는 얼룩은 에탄올 섞은 물을 조금 뿌려서 지웠다. 다들 유리창이 엄청 깨끗해졌다고 해줘서 뿌듯해졌다.
다음으로 객실 청소할 차례다. 이제 주방과 방을 청소하는 건 익숙해졌더니, 오늘은 화장실 청소를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좁은 화장실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다. 방을 치울 때는 머리카락과의 싸움이었는데 화장실을 치울 때에는 머리카락과 물기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장마철이라 습해서 물기를 제대로 닦아내지 않으면 자꾸 곰팡이가 핀다.
어제 서울에 다녀온 여파인지 청소를 끝마치고 나니 기운이 쪽 빠졌다. 아무래도 물을 제대로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땀을 너무 흘려서 탈수 증세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청소를 마치고 언니를 데리러 다시 벽련항으로 갔다. 언니는 열두 시 배를 타고 나와서 내가 오기 전까지 벽련마을 보호수 아래 평상에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차를 숙소 앞에 대놓고 재료를 챙겨 공용주방으로 나왔다. 언니가 애호박과 닭가슴살을 넣어 된장국수를 해준단다. 짭짤이 토마토와 섞박지까지 곁들이니 남부러울 게 없는 식사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여전히 기운이 없다. 서울 친구가 챙겨준 피스타치오맛 오예스 두 봉을 까먹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빨래를 갰다. 계란까지 여섯 알 쪄놓고 누워서 잠이 들었다. 저녁에 서핑을 가볼까 했는데 도무지 체력이 받쳐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다. 서핑을 배워보고 싶다는 언니는 내일 송정솔바람 해변에 데려다 주기로 하고, 오늘은 더 가까운 은모래비치에 가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주말이라 유난히 해변에 사람이 많다. 해수욕장도 개장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색색이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상기되거나 지친 표정으로 해변을 걷고 있다. 누군가 앰프를 가져와 노래를 틀었는지 노랫소리가 크게 울린다. 파라솔 밑에는 사람들이 썬베드를 펼쳐놓고 누워있다. 해송 밑 평상마다 가족들이 편안한 자세로 앉아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하늘은 흐리지만, 흐린 덕분에 더 즐기기 좋은, 남해의 여름이다.
언니와 해변을 따라 걷다가 한산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각자 가져온 책을 읽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이렇게 나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가끔은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며 바다를 구경했다. 여섯 시가 되니 슬슬 출출해진다. 아까 차를 타고 오며 봤던 멕시카나 치킨이 생각났다. 전화로 주문을 하고, 상주중학교 운동장 앞 해변 쪽 도로라고 설명했더니 잠시 후 정확한 위치로 배달이 왔다. 바삭하지만 입천장을 다치게 하지 않는 아주 맛있는 치킨이었다. 시원한 무절임도 통 하나 가득 함께 왔다.
배부르게 먹고 다시 산책을 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해 질 녘이다. 산책이 부족한 느낌이라 두모마을 앞 방파제까지 걷기로 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물놀이장에 아이들이 잔뜩 놀러 와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방파제 위에는 낚시꾼들이 즐비하다. 이제야 피서지가 된 것 같다. 마을을 향해 놓인 돌계단에 앉아 잠시 이야기를 나누며 가져온 물을 마셨다. 하늘이 조금씩 어두컴컴해진다. 하루종일 구름 속에 갇혀있던 하늘에 구름이 밀어낸 틈새가 생기며 한 뼘만큼의 햇살이 들어왔다. 조용한 마을을 지나 논길을 걸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