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씨의 공장기 #8
가볍게 집을 나섰다가 갑작스레 먼 여정을 떠나게 되는 날이 있다. 이 날도 그런 이상한 날 중 하나였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과 곧 여행을 가는 사람 둘이 만났다. 토요일 점심 즈음이었다. 오전 근무를 마치고 배고파하는 언니와 사이좋게 빵을 두 개씩 고르고 커피를 주문했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 한적한 3층 창가 자리에 앉았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에 들어온 기분이다. 빵을 담은 그릇도, 쟁반도, 테이블도, 의자도, 심지어 인테리어 스타일까지 레트로다. 오직 사람들만 2019년 현재에서 왔다.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원래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오백나한전 전시를 보고 이태원이나 해방촌으로 갈 생각이었다. 언니가 필름 카메라를 여행에 가져가려고 오랜만에 꺼내보니 배터리가 방전됐다고 했다. 이촌에서 가까운 용산 전자상가에 들르자고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가 있던 양재에서 용산까지는 생각보다 꽤 멀었다. 지하철을 타고 양재에서 고속터미널로, 갈아타고 노량진으로, 다시 갈아타서 용산에 도착했다. 그런데 두 개 층을 다 돌아다녀보아도 필름 카메라 관련된 장비를 파는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반말로 호객하는 아저씨와 물어도 대답도 안 하는 아줌마 사이를 걷다가 지쳐 아예 종로로 가기로 했다.
세운 전자상가에는 필름 카메라 수리로 유명한 '보고사'라는 곳이 있다. 아버지의 장롱에서 강탈해온 미놀타 카메라를 들고 몇 년 전에 찾아갔던 곳이다. 보고사 사장님은 필름은 바로 옆 가게에 가서 사면 된다고 안내해주었다. 인상 좋은 사장님 한 분이 기다리고 계셨다. 용산을 다 찾아도 필름 카메라 배터리가 없었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더니 높은 임대료 때문이라고 하신다. 이 곳 사장님도 매출이 높지 않아 토요일만 가게를 연다고.
가지각색의 필름 카메라를 구경하다가 각자 필름과 배터리에, 예정에 없던 uv필터까지 사들고 나왔다. 여행을 가기 전에 급하게 필터를 싼 값에 샀는데, 호기심에 내 카메라를 살펴보던 사장님이 어째서 좋은 카메라와 렌즈에 제일 싼 필터를 쓰냐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느껴진 까닭이다.
종로에 온 김에 박물관은 포기하고 광화문까지 산책해서 경복궁역 근처에서 먹태에 맥주를 먹자고 제안했다. 여행 흥에 취한 두 사람은 그렇게 시작한 줄도 몰랐던 하루짜리 서울 여행을 했다. 종로5가역에서 광화문역 방향으로 걷다 보니 갑자기 오른쪽에 마사토가 깔린 널따란 길과 한옥 궁궐의 담장이 보였다. 갔는지 안 갔는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 종묘다. 내친김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입장료는 단돈 천 원. 토요일에는 자유관람을 하고, 나머지 날에는 문화해설사를 동반한 가이드 투어만 가능하다고 한다. 냉큼 표를 끊어 들어가니 초록의 나무 사이로 세 줄로 깔린 돌길이 보인다. 종묘제례 의식을 위해 만든 신로다. 남북 방향으로 길게 놓여 있는 신로의 가운데 길은 신주와 향, 축이 지나가는 신로, 동측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 서측 길은 세자가 다니는 세자로이다. 가운데 신로가 양쪽보다 조금 더 높이 돋아 있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이다. 나무 모양 그대로 고스란히 그림자가 되어 발아래 놓인다. 연못 가운데 놓인 소나무도, 널따란 잔디밭도, 자유롭게 제각기 서 있는 나무들도, 모두 평화롭다. 유럽 궁전의 정원에 익숙해져 있다가 오랜만에 한국의 정원을 걷는다. 어디에 내놓아도 뒤처지지 않는 아름다움과 억지로 꾸며내지 않은 편안함이 감돈다.
종묘는 조선 왕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던 곳이다. 정전과 영녕전에 신주가 모셔져 있으며, 종묘제례를 준비하기 위한 향대청, 재궁, 전사청이 있다. 신주는 나무로 만든 상징물인데, 상하좌우에 구멍이 나 있어 혼이 머물 수 있게 되어 있다. 신주를 모신 신실은 닫혀 있어 대개 보이지 않는다. 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종묘제례 및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해가 비치는 흙길을 따라 걸어 남신문을 통해 정전으로 들어갔다. 궁이라면 화려한 단청이 가장 먼저 보일 텐데, 이 곳은 그 흔한 장식이나 색상 없이 담백하다. 왕실의 제사를 모시는 공간이기에,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장치라고 한다. 기다랗게 이어진 열주 앞을 걸었다. 마침내 측면에 도착하니 기둥이 늘어선 공간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전 뒤편에는 기와가 끝나는 선을 따라 바닥에 오목하게 기와가 한 줄로 깔려 있다. 빗물이 흙바닥을 패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다시 숲길을 따라 걸어 영녕전에 도착했다. 정전에는 태조를 비롯한 49분의 신위가, 영녕전에는 태조의 4대조를 비롯한 34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만큼, 영녕전의 규모는 정전보다 다소 작다. 규모의 차이만큼이나 제사의 규모도 차이가 있는데, 정전에서는 년에 다섯 번 지낼 동안 영녕전에서는 봄과 가을에만 두 차례 지낸다고 한다.
단아한 먹색 기와가 붉은색 기둥 위로 열 맞춰 올라가 있다. 한 바퀴 돌아보고 나가려는데, 측면에 있는 문에 다가가니 겨울의 종묘를 찍은 사진이 저 멀리 있다. 하필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는 곳에 왜 저리 멋진 사진을 걸어두었나 했다. 밖에 나와서 보니 영녕전 뒤편을 공사하느라 가려둔 공사 가림막에 사진작가가 찍은 종묘의 사진을 프린팅한 것이다. 전시가 아니라 가리려는 목적이다 보니 멀리 있을 수밖에! 센스에 감탄했다.
다시 흙길을 따라 걸어 제사를 준비하던 재궁을 구경한 후 밖으로 나왔다. 길 건너 오래된 세운상가 건물이 보였다. 새로 만든 듯한 투명한 유리 엘리베이터가 먼저 눈에 들어오고, 그 위에 있는 유리난간이 보였다. 호기심에 한번 올라가 보자 했다. 스킵플로어로 된 낡은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느린 속도로 오르는 승강기에서 종묘의 입구 격인 외대문과 그 뒤의 숲이 유리벽 너머로 보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반겨주는 것은 세운 4구역 재개발 플랜이다. 무려 30여 년동안 재개발 논의가 있었던 지역이다. 2017년에 국제 지명설계공모를 통해 네덜란드 KCAP의 '서울 세운그라운즈(Seoul Sewoon Grounds)'가 당선되었다. 당시 바로 이 곳 옥상에서 KCAP의 대표 루드 히에테마(Ruurd Gietema)가 직접 작품의도를 프레젠테이션 했다고 한다.
작품 패널 너머로 유리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아래가 내려다 보인다. 주변의 화려한 고층 건물 사이로 세운상가 바로 옆 구역만 허름한 판잣집들이 얼기설기 놓여 있다. 마치 인도의 빈민가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다. 뉴스로는 접했지만, 실제로 보니 다소 충격적인 장면이다. 현대 서울에 이런 공간이 아직까지 있다는 것을, 서울 시민들은 알고 있을까. 옥상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재개발의 당위를 설명해주는 공간이다.
다시 발길을 옮겨 옥상 데크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옥상 공간이 꽤 넓다. 좌우로 차양과 벤치가 있어 시민들이 편히 기대듯 누워 오후의 햇살과 바람을 즐기고 있다. 나무 데크를 밟고 더 높이 올라갔다. 계단식 데크 사이로 경사로를 만들어 두었다. 배리어 프리(Barrier Free) 디자인이다. 계단 꼭대기에 종묘 앞에서 보았던 그 난간이 펼쳐져 있다. 특별한 것 없이 유리로 만든 난간인데, 보이는 풍경은 몹시 특별하다. 북쪽으로는 종묘가, 동쪽과 서쪽으로는 종로 거리와 재개발 구역이 보인다. 석양을 구경하기에 안성맞춤일 것이다. 아쉽게도 해가 지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해넘이 구경은 다음으로 미루었다. 잠시 벤치에 앉아 쉬니 바람이 알맞게 불어 땀을 식혀준다. 맥주 한 잔이 간절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광화문으로 향했다. 종로 5가에서 30분이면 갈 거리를 여기저기 참견하고 구경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갈증이 발길을 재촉한다. 퀴어 축제가 있는 날이다. 갈수록 무지개 깃발을 들고 페이스페인팅을 한 무리가 점점 많이 보인다. 종로경찰서와 구청을 지나 교보문고로 내려갔다. 귀여운 문구류를 구경하다가 포스트잇을 몇 개 사서 나왔다.
물로 목을 축였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맥주가 눈 앞에 어른거려 서둘러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먹태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전이다. 친구를 따라 이주당에 왔다가 처음 맛을 보게 되었고, 이후로도 광화문을 오게 될 일이 있으면 늘 들러 맥주를 곁들여 먹은 것이다. 코젤 다크에 시나몬을 두르고 뿌려 마신다는 것도 이 곳에서 처음 알았다. 먹태는 껍질이 거무스름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황태를 만들다가 겨울 날씨가 포근해서 바짝 얼지 못해 껍질 색이 변하고 살이 부드러워진 것이다. 이주당에서는 안주로 제격이라고 해서 주당태라고 부른다.
만 오천 보 넘게 걸은 두 사람은 배가 고파 각자 맥주 한 잔씩과 주당태, 카레치킨과 감자튀김 세트를 주문했다. 셋이서도 넉넉히 먹을 만한 양이 나왔다. 유월 첫날에 벌써 여름밤이 되어 버린 날씨에 맥주는 달기만 하다. 천천히 술잔을 기울이며 안주 접시를 싹싹 비우고는 인사동 거리를 걸었다. 안국역에 도착해서야 소화가 조금 되는 느낌이다. 웬 주말 하루를 바지런히도 돌아다녔는지. 여행객의 눈으로 본 서울은 새롭기만 하다. 언니의 무사 여행을 기원하며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d. 2019.6.1. 주말 하루짜리 서울
공장기(空場記) :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록
우리는 매일 여행을 하며 살아갑니다. 집에서 회사로, 학교로, 카페로, 서점으로, 그리고 다시 집으로. 여행에서 만난 공간과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담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