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조실의 풍경
“그 순간의 감정은 분명 사랑이 맞았습니다. 이걸 어떻게 설명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손에 낀 반지를 보아하니 결혼을 하신 듯합니다. 그리고 그 반지의 빛이 바랜 정도를 보니 사모님과 함께하신 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하군요. 경관님께서는 그런 적 없으신가요? 결혼을 한 뒤로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맞나? 싶은 감정이 들 때 말입니다. 가끔 아내 분이 여자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지 않으시던가요? 펑퍼짐한 추리닝 차림에 땅바닥에 앉아 아이들이 남긴 음식을 집어먹는 것을 볼 때나, 아무렇지도 않게 옷을 들추고는 가려운 곳을 거칠게 긁어대는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릴 때나, TV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주름이 군데군데 파인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아 그 외모가 선명하게 비교될 때가 있었던 적이 있었지 않느냐는 물음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며 계속하라고 턱짓했다. 속기관이 타자를 두드리는 소리만 빈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는 여유로운 미소를 거두지 않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만일 그렇다면 저도 경관님과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권태이죠. 다만 제가 여기 있는 이유는 단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의례, 단순히 의례가 없었다는 이유이죠. [내 여자친구가 되어줄래?] 나 [나랑 사귀자]와 같은 시답잖은 허례 말입니다. 요즘에 누가 이런 방식으로 고백을 한다는 말입니까? 경관님이 한창 이성을 만나셨을 때는 모르겠지만 요즘은 남녀가 다 이렇게 만난답니다. 시대가 바뀐 것뿐이라고요. 저희는 구질구질하게 말로 확인받은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확인한 것입니다. 좋아하지도 않은 이성과 잔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침대가... 그 스프링이 다 나간 싸구려 침대가 삐걱거리는 와중에도 우리는 분명 사랑을 느꼈거든요. 그 아슬아슬한 관계가 끝나고 제가 말했죠. 사랑한다고. 그녀도 숨을 헐떡이며 똑똑히 말했습니다. 자기도 사랑한다고 말이죠. 그녀를 꼭 끌어안은 채 천장을 올려다보니 거울에 아주 사랑스럽고도 비극적인 운명의 연인이 비치더군요.”
그는 말을 잠시 멈추고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가는 어느새 촉촉해져 있었다. 그는 그 커다란 눈망울을 통해 나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경관님. 정말 단 한 번도 권태를 느낀 적이 없으십니까? TV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아내분과 손을 잡고 동네를 산책하면서 스쳐간 젊은 여자나, 하다못해 여기 경관님의 일터에서라도 말이죠. 예를 들어 저 기록관은 꽤 미인이시군요. 속으로 정녕 한 번도 ‘저런 여자를 만나봤으면’ 싶었던 적이 없나요? 저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자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경관님을 구속하지 않아요. 당연히 양자 간의 합의는 있어야 하겠죠. 그리고 불륜은 권하지 못할 짓입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지요. 그러나 기혼자는 이혼한 후에, 미혼자는 그 전의 관계를 정리하고 만나면 될 일입니다. 당연히 새롭게 만날 상대방의 의사도 확인해야지요. 물론 권위나 무력을 통해 강제로 상대방의 몸과 마음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될 따름입니다.”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똑 솟은 코에 머리칼이 걸려 간지러워 보였다. 그는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채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는 리모컨을 찾더군요. 저는 사실 TV를 잘 보지 않습니다. 나와 별로 관계없는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거든요. 그래도 저는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시답잖은 시간낭비에도 함께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능 방송 속 연예인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는 참기 힘들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그녀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쳐다보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에서 나오는 화사한 빛이 화장기가 군데군데 지워진 얼굴의 주름살을 스포트라이트처럼 비추어 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주워 입고는 아주 아픈 마음을 붙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하루 간 서로를 사랑했지만 이제 헤어져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말이죠. 그리고 그녀가 이별을 받아들이면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그녀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저를 신고한다고 하더군요. 그것 참 웃기지 않습니까? 나는 그저 헤어진 전 남자친구일 뿐인데 저더러 강간범이라고 하더군요. 강간범이라니. 그건 참을 수가 없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아니죠. 사랑했던 사이였거든요. 그 순간 사랑의 감정이 모조리 사라졌습니다. 교제와 이별, 그 처음과 끝이 이미 내 마음속에서는 충분히 경계 지어졌어요. 무시하고 나서려는데 하필 왜 그 순간에 내 손이 닿는 화장대에 커피 포트가 놓여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침 저희가 마주한 이 테이블처럼 차갑고 단단한 재질이었죠. 저는 끊임없이 악을 쓰는 옛 연인의 입을 좀 조용히 해주려 했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니 말이죠. 그 순간은 아마 ‘교제 중’이었던 시기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그 사이에 제 제안을 받아들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시작과 끝은 항상 양자 간 합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연인으로서 그녀의 오해를 풀기에 더 적격이었던 상황이었군요. 그런데 경관님, 그 손을 좀 치워주시겠습니까. 눈이 너무 부십니다요.”
내 손가락의 반지에 조사실의 형광등이 비쳤는지 그는 눈을 찡그렸다. 나는 손을 깍지 낀 채로 모아 책상에 올려두었다. 맞은편 그의 양쪽 손목에 채워진 수갑에서도 은빛이 시리게 빛났다. 그 역시 깍지 낀 손을 올려둔 채 말을 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조금씩 미소가 사라져 갔다.
“그건 순간이었고, 지금도 순간일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순간만이 남은 시간을 채워나가겠죠. 정신을 차려보니 방 안에는 그 재미없는 농담과 오버하는 리액션만 가득했습니다. 그 희미한 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엔 처음 만났던 어제의 아름다움은 온데간데없더군요. 핏기 하나 없이 축 늘어진 몰골을 보자, 그제야 저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다면 내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겠군요. 그런데 경관님. 이제 답을 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혹여 저처럼 순간 마음이 흔들린 적이 있다고 한다면 당신의 결혼이… 아니 당신의 사랑이 제 사랑과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죄를 고백한 범죄자와의 면담을 마쳤다. 그는 유치장으로 돌아갔고 나는 취조실을 나섰다. 어둑해진 밤을 헤치고 집에 도착하니 아이들은 이미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아내는 불을 끈 채로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볼륨을 한껏 줄인 스피커에서는 예능인들의 짓궂은 농담과 과장된 큰 웃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눈가에 깊게 파인 아주 익숙한 주름이 희뿌연 미광에 비쳐서 순간 눈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