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 12월과 1월의 사이에서

年界

by 일요일의 조작가

찬찬히 눈을 뜨자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선명해진다. 눈이 부실 정도로 흰 천장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천장에 넓게 뿌리내린 조명이 주광식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잠시 들었으나 그렇지는 않다. 내가 누워있는 침대가로는 큰 여닫이 창문이 조금 열려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는 건장한 체격의 한 사내가 흰 토가를 몸에 두른 채 어두컴컴한 밭을 갈고 있다. 고랑 사이를 익숙한 듯 무심하게도 내딛는다. 창밖 가득 메운 거대한 밭에서 홀로 노동하는 그의 모습이 엄숙하게 느껴진다. 어떤 작물도 자라지 않은 어둡고도 텅 빈 밭이 공허하다.


나는 창가에서 멀어져 응접용 소파에 앉는다. 방금 탁자에 놓인 듯한 찻잔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춤추고 있다. 검붉은 차가 놓여있다. 나는 찻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힘겹게 입으로 가져간다. 비릿한 향이 콧 속을 가득 메운다. 한 모금 마시니 뜨듯한 액체가 목구멍을 넘어간다.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잔속의 액체가 이리저리 요동치나 아슬아슬하게 잔 모서리의 경계를 넘어서진 않는다.


“한 번에 삼키지 말고 천천히, 그러나 다 드시오. 위장이 데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샌가 문가에는 누군가가 기대어 서있었다. 그는 두툼한 손으로 마시는 시늉을 해보인다. 그는 마치 석고처럼 흰 토가를 입고 있었으나 피부도 눈처럼 하얗기에 마치 옷을 입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나를 지긋하게 바라보며 미소를 지을 뿐, 함께 자리하여 차를 마시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얼굴에 계속 서려있는 짓궂은 미소에 살짝 약이 올라 그의 경고를 무시하고 남은 차를 한 번에 들이켠다.


“여기는 어디입니까?”


그는 내가 묻는 말에는 답하지 않는다.


“지금은 적기요. 사실은 언제든지 적기지. 심을 때부터가 시작이니까. 당신은 아직 시간에 올라타있지 않소이다. 다 드셨으면 따라오시오.”


나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를 따라간다. 그를 따라 밖으로 나서자 창밖으로 보았던 광활한 밭으로 들어선다.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광활한 밭 한가운데에 놓인 그의 거처가 너무 작다고 느껴진다. 그를 따라 한참을 걸었다. 그러나 걸어도 걸어도 같은 풍경이다. 한참을 걸은 것 같은데 계속 제자리를 맴도는 것 같다. 세상에는 거대한 텃밭과 검은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하늘에는 별이 가득하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차를 마셨던 그의 흰 공간이 좁쌀처럼 작아져 있다. 이 쌀쌀한 공간에 그가 갑자기 우뚝 멈춰 선다.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했다. 내가 입은 허름한 옷이 그의 흰 옷에 자국을 남길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끝없이 늘어선 이랑 한 군데, 그가 멈춰 선 곳에는 작은 구덩이가 파여있다.


“자! 여기가 당신 자리니 심으시오.”


그가 희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구덩이를 가리킨다.


나는 파종의 의미를 이미 알고 있다. 옆구리에 낀 내 머리를 천천히 내려놓는다.


“아니, 그렇게 말고 반대로.”


그는 두 손으로 허공에서 공을 뒤집는 시늉을 하였다.


나는 앙상하고도 주름진 손으로 마찬가지로 주름지고도 앙상한 머리를 뒤집어 정수리를 땅바닥에 자리하도록 뒤집었다.


“그대로 심으면 나중에 힘들었을 것이라 느낄 거요. 당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요.”


그는 말을 마치고 웃으며 내 손에 삽을 건넨다.


나는 힘겹게 삽을 들고 머리를 묻고 자리를 다졌다. 시야가 어두워지니 아까 마신 차의 비릿한 맛이 입에 남는다. 입천장이 까졌나? 아까 그의 경고를 무시한 것을 후회한다. 그러나 기분 좋은 흙내음을 맡는다. 두 볼에 닿는 포근한 감촉에 더 이상 춥지 않다.


누군가 내 손에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한 지주대를 건넸다. 그것이 누구인지는 충분히 짐작이 간다. 두 손으로 힘껏 쥐고 두둑 한가운데에 박아 넣는다. 지주대 마디마다 돋은 돌기 덕분에 손이 얼얼하다. 손바닥의 시큰거림을 느낄 새도 없이 몸통은 어느새 그의 품에 안겨있다. 그가 내 말라 비틀어진 몸뚱이를 바스러뜨리는 게 느껴진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머리가 심긴 자리에 바스라진 내 몸을 흩뿌린다.


“더 궁금한 게 있습니까?”


그는 손바닥을 털며 짓궂게 묻는다.


나는 봄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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