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말 ) 해 봐!-
-할미!! 할미야!-
-아니 할미 말고 할!. 머.! 니!-
-할.. 할 머니-
'맨 처음 고백은 힘이 들어라' 나올 듯 나올 듯하다가 끝내 입속에서만 맴돌다 사라지곤 하던 할. 머. 니라는 말을 손녀가 성공하던 날 가슴이 벌름거렸다. 세상의 가장 순수한 목소리로 들은 할머니라는 말, 거기 까지는 좋았다.
" 할머니 바보?"
명색이 국어교사, 언어의 정점인 스님들의 선어를 논문으로 쓰기도 했던 할머니가 손녀와 처음 소통한 언어가 '아름답다'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예쁘다' '맛있다'도 아닌 생존에 직결된 '응가'도' 쉬야'도 아닌
바보라니?
오늘도 허둥지둥 유모차 끌고 가서 어린이집에서 하원하는 손녀를 받아 왔다.
"진아 , 천천히 갈까? 빨리 뛸까? 초고속으로 달릴까?"
날이 추웠다. 아침에 날이 푹해서 옷을 좀 얇게 입혀보낸 게 걸려 하원 길에 챙겨간 유모차 덮개였다.
덮개를 다 씌웠더니 투명 비닐 사각 창에 비친 손녀 얼굴이 숨이 막힐 듯 답답해 보인다.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처... 고슥.."
이제 말 배우기 시작한 손녀의 대답.
"오케이 초고속이다!!!
씽씽 유모차 바퀴 굴려 달린다. 손녀는 재밌는지. 까르륵.. 까르륵 웃는다.
드디어 아파트 건물들을 돌아 돌아 우리 동 앞에 도착.
아파트 호수 누르고 비밀번호 네 자리 누르자.. 찍... 에러 소리!!
다시 시도하라는 소리. 잠시 멈칫하는 사이 금방 손녀 입에서 나오는 말,
-할머니 바보- 빙긋이 웃으며 놀린다.
- 아녀 아녀 할머니 바보 아녀.- 호들갑스럽게 진짜 바보가 안 되려고
얼른 핸드폰 저장 문자 보고 비번 입력하여 문을 연다.
-자 봐. 하머니 바보 아니지 -
- 바보, 하머니 바보 - 계속 놀린다.
아파트 입구 진입은 성공. 그러나 또 통과해야 할 문이 있다.
이번에는 무려 여섯 자리.. 번호가 복잡해서 외어도 다음 날이 되면 금방 잊어버린다
집에 아침에 읽다만 츄피의 스키장 이야기도 더 읽어 달라 하고 싶고 오줌 싼 기저귀도
갈고 싶고, 빨리 들어가고 싶은 데..
지문인식을 한 엄마 아빠처럼 재빠르게 문을 못 열어주고 시간 걸리고 뭉그적거리는 할머니가 갑갑하기도 하리라.오늘도 바보 소리 들었다
날마다 손녀에게 바보소리 안 듣고는 하루가 안 지나간다.
바 보.. 그러고 보니 그 귀한 손녀와의 첫 언어를 바보로 만든 주인공이 바로 나다.
일반적으로 무언가 모자라고 잘못하고 자기 것도 잘 못 챙기는 사람을 바보라 한다.
처음으로 어린이집 손녀를 데리러 가는 날이었다. 유모차 끌고 가는 할머니. 내 로망 중의 한 그림이기도 했다
그런데 급히 나가다 보니 팬트리에 보관하는데 걸리작거리는 유모차 손잡이를 떼어놓은 걸 미처 다 달지도 못하고 그냥 간 거였다. 내 품에 앉긴 손녀를 유모차에 태우려 보니 손잡이가 안 끼어져 있다는 걸 발견했다. 손녀를 다시 내려놓고 끼우려 하는데 위, 아래 방향이 자꾸 뒤집어진다. 옆 엄마들의 시선이 다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그리고 무엇보다 보채지 않고 할머니 하는 것을 뚫어지게 집중해서 보는 손녀가 부끄러워 얼른 손녀를 앉히고 한쪽 손으로 그냥 유모차를 밀고 갔다. 사람들 시선이 없는 곳에서 겨우 달아 집으로 태워 왔다.
그 손잡이를 다는 동안 손녀가 지루할까 봐
"할머니는 바보래요. 바보.. 바보 할머니..."
일부러 과장되게 동작하면서 힙합톤으로 자작 노래를 불러주었더니 손녀는 까르르까르르... 웃고 너무너무 좋아했다. 그리고 바보.. 바보 자기도 자꾸 입모양을 보고 따라 했다. 젊잖고 반듯한 말의 세계보다 빵꾸똥꾸라는 루저적인 언어세계 속에 더 현타와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는 우리 둘이 소통했다고 즐거웠다. 이게 바보라는 언어의 시초이다.
내가 손녀에게 바보라고 고백하는 것은 나이 든 사람으로서 예의나 권위나 교육을 시키는 어른이 아닌 그냥 손녀와 같은 눈높이로 있는 그대로 같이 즐기며 놀겠다는 내 마음의 표현이다. 손녀가 거침없이 나를 바보라 하는 것도 어른도 완벽하지 않아 실수도 할 수 있고 그 말을 발설함으로서 할머니가 아니라고 부정하며 그 말을 안 들을려고 과장 행위하는 동작이 웃기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할머니 바보'라는 손녀의 언어는 자기는 어리버리한 언니와 달리 똑똑하다고 자뻑하는 이모할머니 혼을 빼놓기도 한다. 우리 자매들 들 중 가장 젊지만 손녀의 가방에서 나온 최신식 물병은 첨이라 어떻게 열지 몰라 쩔쩔맸다. 기다렸다는 듯이 손녀는 "할머니 바보"를 외치고 바보가 안되려 온 몸으로 뚜껑을 여는 할머니..드디어 열었다. 큰 승진시험 합격했을 때 보다 더 의기양양하게
" 자 봤지 ? 봤 지? 나 니네 할머니랑 달라 .이모 할머니 는바 보 아녀.하하하"
좀 늦게 열어서 같이 바보대열에 서기를 원했던 내 사악한 마음속까지 꿰뚫는 말을 하는 바람에 나도 같이 따라 웃고 말았다.
바보라는 말은 서먹하던 이모할머니와 손녀의 마음이 금시 따뜻해지고 경계가 없어지게 만들어졌다. 잠시 공간이 동화의 세계로 바뀌는 마법의 순간. 행복하고 따뜻한 순간. 나 만의 과대망상인가? 반듯하고 예의 바르고 정확하고 의미가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고 가르쳐야만 제대로 된 가정교육이라 생각하신 엄마들은 날 정신 나간 할머니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완벽한 것은 숨이 막히게 한다.
살아있는 것은 숨구멍이 있어야 한다.
좀 모자라는 사람이 있으니 그 모자라는 사람을 도울 잘난 사람도 있는 법이고 세상에 백프로 모자라는 사람은 없고 모든 것이 완벽한 사람은 없다. 모자라는 면이 서로 다를 뿐이다 모자라는 부분을 서로 도와주고 세상에 바보와 바보 아닌 사람의 경계는 사실 없다.
자기 것을 완벽하게 잘 챙기는 사람보다 자기 것 챙기는데 무심해서 자기 것 잘 못 챙기는 사람이 실은 남의 것을 잘 챙기는 배려하는 사람이고 자기 것 보다 여러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니 리더가 될 확률이 높다.
리더와 바보가 따로 없다. 사실 사회가 필요에 의해서 그렇게 나눌 뿐이다
손녀가 이 세상에 나와 할머니와 처음으로 소통하며 배운 바보라는 말..
물론 손녀에게도 "진이 바보" 라고 놀린다. 자신의 실수에도 너무 예민하지 않고 유머와 여유 가지도록.
할머니와 손녀의 첫번째 소통언어로 바보를 기록한다
손녀가 자라 이 글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