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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찻집의 마지막 찻잔

-찻잔 아닌 커피잔 같은 찻잔-

by tea웨이




"이 도끼가 니 도끼냐?"

쇠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이 금, 은도끼를 들이밀며 유혹한 산신령님과 밀당했던 이야기. 한국인이라면 모두 아는 금도끼 은도끼 전래 동화. 내겐 나무꾼이 정직해서 복 받았다는 기존 해설보다 나무꾼이 나무꾼답게 살기 위해 쇠도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자기 정체성을 정확히 안 사람의 승리라고

혼자 상상해 본 적도 있다. 나무꾼의 정체성은 나무를 잘 잘르는 것이다. 가장 잘 잘라지는 도끼가 쇠이지 않을까? 금도끼, 은도끼는 금은방 장사군에게 어울리는...

인생 2막은 아무리 금도끼 은도끼로 유혹해도 자신에게 맞는 삶을 선택하는 자신의 내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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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외곽에 고소안 (古桑庵)이라는 찻집이 있다.

다이쇼 시대에 지어진 자신의 집을 개조해 만든 오래된 찻집이다. 일본의 제대로 된 고 건축물인 고소안 찻집은 한국의 고건축인 우리 찻집과 닮아서 운영방식과 메뉴를 벤치마킹하고 싶었다.. 특히

메뉴가 레귤러커피, 안 미스, 녹차(+화과자)로 심플했는데 어떤 생각으로 어떤 방법으로 커피를 내놓는지 궁금했다. 한참 차만 파는 우리 공간에 불만인 손님들 때문에 커피를 메뉴로 내놓아야 하나 고민하던 참이었다.

고소 안은 도쿄 중심가에서 지하철을 꽤 오래 타고 또 한참을 도보로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도착한 고소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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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렇게 기대하고 간 고소 안은 문이 닫혀 있었다. 얼마나 허망했는지.... 저 문 앞에서 오랫동안 서성이었다. 하룻밤 자고 다음날 올까.. 생각하다. 문득 첨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로망 하나쯤 그냥 상상으로 남기고 이루지 말고 사라진 들 어떠랴

꼭 눈으로 보고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에서 카피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 마음 가는 대로 이 세상에서 한 번도 없었던 그 어떤 것을 그냥 한 번 만들어 보면 어떨까?

일단 해보고 손님들 반응 보고 아니면 또 버리고 다시 시작하고...


오랜 찻잔 여행의 종지부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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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에게 드리는 마지막 찻잔을 준비하는 날이었다

한 달 전부터 내게 예약을 하신 분이라 어쩔 수 없이 찻자리를 준비했다.

찻잔과 커피잔 둘 모두를 준비한 세팅이다.

아니 차도 품을 수 있고 커피도 품을 수 있는 찻잔이다

커피를 차도구 제대로 갖추어 차처럼 천천히 우려 마시는 로망을 못해 본 것은 아쉽다

사실 찻잔은 어디까지나 비유 수단일 뿐이다. 먹고사는 밥그릇, 즉 몸과 물질 말고

조금 더 마음과 정신문화도 챙기자는 말이다. 그러니 찻잔이니 커피잔이니 무슨 구분이 필요하랴






공간은 흐르는 물처럼 변한다. 찻집 주인도 변한다. 날마다 드나드는 새로운 손님과의 밀당으로.

주인과 손님의 소통 메신저는 언어가 아닌 찻잔이다.

각 찻집 주인들이 내놓은 찻잔에는 찻집주인의 철학이 담겨있다.

그럼 이 주인의 찻잔에 대한 마음은 손님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가끔..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먼산만 바라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에

쿵하면 떨어져 나가는 삶의 무게가 있습니다. 떨어져 나간 그 무게만큼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곤 하죠

아마도 우린 그걸 힐링이라고 부를 겁니다.

문화공간 ㅇㅇ는 이용료를 지불하면 차 한 잔을 무료로 제공합니다

찻값을 내고 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이용하는 대신 차를 한잔 제공해 주는 방식입니다.

이거나 그거나 그 말이나 이 말이나 같은 의미이지만

이런 공간을 만드신 분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저 역시 이런 방식으로 농장을 운영하려고 합니다

가치를 바라보는 기준의 차이인 것 같아요


-blog.naver.com/gashmu/221371113666-



마른 꽃 걸린 창가는 아니지만 따쓰한 온돌방의 창호로 하얀 송이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단아한 'ㅇㅇ'의 아낙이 녹차와 황차를 권했다. 차림표 따위가 없어 좋다. 차 한 잔에 노을하나 다식으로 삼으면 될 터에 전통차, 대용차의 많은 차림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은 흑과 백만 있는 세상이니 간결해서 좋다. 이럴 때는 선택의 여자가 없다. 뜨거운 물 바로 부어 마시는 황차가 오늘의 특선 메뉴다.

이런 날은 주전자 위로 찻물이 넘쳐도 좋다. 그러라고 주전자 밑에 작은 수반까지 받쳐 왔나 보다. 진한 다갈색 황차가 피우는 향에 외로움도 저만치 달아나게 된다


여기 'ㅇㅇ'의 외로움은 진부하지 않다. 주접스레 눈물을 섞어 마시는 외로움의 노래가 필요하지 않았다. 색채 번잡한 세상을 떠나 신선세게에 마실 온 내가 구두라도 한 짝을 흘려 놓고 가야겠다

여행길에 찻집. -유정호 - 인문출판사



찻집주인은 찻잔을 통해 전하려는 마음이 손님과 잘 소통되었다는 기쁨과

힐링이라는 말의 숨은 의미, 진부하지 않은 외로움이라는 낯선 감성을 손님께 배웠다


에필로그


-퇴직 후 인생 2막 , 열자마자 망한다! -

오늘 아침 신문 기사 제목이다. 저런 기사를 보면 화가 난다. 이막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실감 없이 쓰는 저런 기사가 나이 든 정식 은퇴자님들이나 젊은 조기 은퇴자님들에게 얼마나 공포와 두려움을 줄지 너무나 잘 알기에. 특히 가만히만 있어도 사회적 자아인 명함과 월급 통장에 돈이 입금 되는 일 막을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노심초사하는 젊은 조기 은퇴자들의 마음은 경험해 봐서..

사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번 해보면

성공 실패를 떠나서 남의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살았다는 뿌듯함
내가 주체가 된 삶을 살아본 사람 만이 뿜어 나오는 자신감


주차장에서는 안 보이다가 돌담길 모퉁이를 돌자마자 신세계처럼 등장하는 호수 풍경

에 반해 이십 년을 머무르다가 돌아 나오면서 저처럼

힘들었지만 잘 살았네 하고 나올 거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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