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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스테이 '잔월'의 찻잔

-이막 끝, 삼막 시작-

by tea웨이


찻잔 들고 이막 인생, 어느새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호수가 유명해졌습니다. 출렁다리가 생기고 찻집 옆 작약 꽃밭은 드라마 촬영지가 되었습니다. 산책로도 생겨 한적했던 길이 붐비기 시작했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몇십억씩 투자해서 만들었다는 대형 카페들이 출몰했고. 호수물만 보이면 카페가 들어서서 카페천국이 되어갑니다.

온전한 찻잔도 힘이 든다는데 깨지고 금 간 찻잔은 자꾸 힘이 부칩니다.




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깨진 찻잔은 로망의 공간을 발견하고 다시 꿈을 꿉니다.

지겹고 지겨운 그놈의 꿈

그러나 꿈을 현실로 만들어 줄 몸이 늙고 망가져 불가능함을 깨닫습니다.

인생 이막도 끝났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열심히 기록하는 일입니다

누군가의 몸이 내 꿈을 이루어주시길 바라는 꿈을 꾸며 ..

찻물이 줄줄 새는 몸으로 열심히 기록합니다.

제 인생 3막은 기록입니다


제주 여행에 왔습니다. 멤버는 초임지에서 만났던 40년 지기 샘들 다섯. 파릇파릇한 새싹 초짜 교사들이 이제는 국가 인정 정식 초보 노인들이 되어 뚜벅뚜벅 노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참입니다. 마음은 젊은데 그 젊은 맘은 볼 수도 만질 수 없는 헛것일 뿐입니다. 불쌍하다고 봐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생, 노, 병, 사 자기 길을 걷는 몸의 길에 휘둘리며 노년의 길을 갑니다.


여섯 명 중 한 분은 이미 몸에 휘둘려 여행을 같이 못 다닌 지가 꽤 되었습니다. 나는 몸의 부실한 곳을 찾아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해 가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눈썹은 눈썹 문신으로 힘을 주고 부족한 뼛속 골을 채우기 위해 골다공증 주사도 맞습니다. 비틀어지는 몸의 균형을 위해 요가도 합니다.

노력한 만큼 조금씩 리모델링도 되는 것 같지만... 정말 안타깝게 리모델링이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입니다.





젊은 시절 아무리 몸을 혹사시켜도 , 스트레스로 맘이 상해도 잠

한번 푹 자주면 어느 우주의 동굴에서 쉬었다 오는지.. 뇌 속이 개운해지고 텅 비워져 완전 리셋이 되어

다시 출발할 수 있는 빈 공간이 열리고 새 희망을 품을 수 있게 해 주던 그 잠!!!!! 그 잠은 이제 이생에서는 영영 만나기가 힘들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 보다 영빨이 민감하고 발달해서 잠 이 주는 귀한 선물인 꿈을 엄청 받았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태어난 아이의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태몽을 풀이하며 소통하던 즐거움.

, 똥, 물, 새, 부고, 산... 꿈속의 상징물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알고 가끔 복권도 사고 아직도 내게 남은 귀인도 혹시 있을까 가슴 조이던 꿈. 이제 그 꿈의 물줄기는 끝났고 그 자리에 잠꼬대와 코 고는 소리만이 요란합니다. 잠꼬대 코 고는 소리.. 느려진 몸.

타인에게 민폐는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내 알량한 자존심은 이 모임도 내가 정리해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호시탐탐 빠질 궁리 중이었습니다

예약만 해주고 핑계 대고 빠지자...


식도락도 , 경치도 , 쇼핑도, 사람 구경도. 핫한 풍경 그런 여행이 내게 무슨 의미가 있나?

그러다

스.. 테.. 이

이 말에 완전히 빠졌습니다.

고기 굽는 펜션도 아니고 , 쇼핑 강변뷰 바다뷰 시티뷰 하는 럭셔리 호텔도 아닌 , 일상여행인 비엔비도 아닌.... 내가 그토록 원했던 '잘 자고 싶고 꿈꾸는 공간" 아닐까? 더구나 찻잔까지 낀.....

요란한 코골이, 옆사람 잠 못 자게 하는 잠꼬대.. 약기운이 없으면 , 느릿해지며 무슨 지랄을 떨지 모르는 몸. 아.. 그런데 스테이잖아. 잠시 자존감은 찜 쪄먹자. 심란하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여행에 참석한 참입니다.




허름한 마을 골목길 공간, 대문을 여니 오늘 종일 본 그 많고 흔한 동백꽃도 아니고 방금 일인 천 원씩 내고 사진 찍은 산방산 밑 노란 유채꽃도 아닌 저승에 들어선 것 같은 쓸쓸하고 삭막한 갈대...

그러나 실내로 들어서자 이런 풍경이...

... 따뜻한 공기, 차분하고 정성스러운. 공간 하나하나 창을 낸 곳을 보시라. 문득 짐처럼 부담되는

내 몸도 이 공간에서는 귀히 여겨집니다.





잠시 일행들이 간단한 저녁을 먹으러 마을로 산보 나간 사이 혼자 고요하게 차를 마셨습니다. 이 오롯한 찻자리를 위해 밥도 거절했습니다

. 다탁 앞으로 펼쳐지는 풍경. 높지도 낮지도 않게 편안한 데다가 마당의 조경과 나무 사이의 지붕 풍경이 양명함보다는 약간의 그늘과 촉촉하고 무속적인 원초의 감성... 맞습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나는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려 생사를 헤맨 적이 있었답니 다. 엄마 아빠도 포기하고 차디찬 윗목에 뉘어 놓았을 때 끝까지 찬물 떠놓고 빌었다던 외할머니의 비나리.. 아픈 손으로 거친 손으로 내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세상에서 제일 귀히 대접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던.. 기억..




철저히 식물성인 찻잎에서 어떻게 그리 느끼하면서 고소하고 부드러운 우유향이 나는지.. 늘 궁금한 우롱차였는데 우롱차 증에서도 내 마음의 모서리 각진 날카로움을 다 제거한 듯한 부드러운 '밀키 우롱티, 포근' 포근 차 한 잔에 마음의 허리띠도 다 풀러 져 느슨해져 버렸습니다


뿐인가요.. 이성적으로 생각을 몰아가 메말라 있던 내 안의 잠자고 있는 감정이 꽃잎과 찻잎향에 질컥하게 빠지게 합니다. ' 브라보 마이 라이프 '- 오렌지와 껍질 그리고 루이보스로 이루어진 진중이라는 차-라는 이름의 차가 오늘 이 공간의 웰컴티였습니다.


이 두 개의 차면 충분합니다. 이 차실에서 일행들과 마시고 싶어 준비해 온 많은 티들은 다시 여행 가방에 집어넣었습니다.





술만 취하는 게 아니라 차 한잔도 사람을 취하게 합니다.

차에 취한 내 혀와 마음은 돌아온 일행들에게 밀키우롱티 한 잔씩 대접하면서 미쳐갔습니다. 내가 입었던 옷을 울다가 웃다가 욕하다가 토하다가 하나씩 벗고 알몸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벗을 옷이 없는 알몸이 되었을 때 잠시 부끄러움을 느끼고 후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내 찻잔은 금이 가고 줄줄 새어서 차 한 잔 줄 수 없습니다.

'티타임'이라는 칠레 다큐 영화가 있습니다.. 여고 졸업 후 60년쯤 지나

80대 된 다섯 할머님들의 계모임을 4년 동안 다큐로 찍은 영화입니다. 감독은 그 할머님들 손녀 따님

중 한분. 메이드들이 티파티 준비하는 것 이 조금 낯선 풍경이었을 뿐. 어느 나라나 할머니들의 인생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영화였습니다. 나이 들었다고 할머니들 안의 세속적 욕망이 승화된다거나 정신이 성숙해지는 것도 아니고. 잘 사나 못 사나 느리게 만나거나 좀 일찍 만나거나 할 뿐 티타임의 자리가 비면 아파서 사라진 줄 알아라 ! 이제 이 모임도 굿바이다 고백만 하면 된다 했던 순간..

안정되고 귀한 찻잔으로 자리 잡고 자신감 넘쳐 보이던 깨진 찻잔 들이 느닷없이

깨진 찻잔 릴레이 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자기의 힘듦이 자기 만의 것이 아니라 타인도 비슷하다는 걸 깨닫고 불행에서 벗어났습니다.


내 찻잔만 깨지고 금 간 줄 알았는데 다섯 개의 찻잔 모두 금이 가고 깨지고... 열심히 산 사람일수록 더 깊게 깨진 상처가 나 있다는 것. 깨진 찻잔이었음에도 이 모임에서는 깨진 찻잔이 아닌 있는 그래로 대접받았음을. 모두 다 알고 있었던 걸 나만 내 오만으로 눈 감고 있었음을..


이미 알몸으로 서로의 상처를 애틋하게 짠하게 여기며 좁은 욕조에서 기대고 있는 분들 사이에 내 부끄러운 알몸을 비집고 넣었습니다.

내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야


오늘은 이 공간 저 침대에서 잃어버린 잠을 찾아 잘 자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늙은 몸의 잠은 젊은 몸의 잠과는 달라야 한다.


잠은 죽음의 연습입니다.

긴 잠이 , 영원히 깨어나지 못하는 잠이 죽음입니다.

품위 있게 죽고 싶습니다. 그럴려면 품위 있게 자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잘 자고 품위있게 죽는 경험을 하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찻잔들고 스테이 !

호숫가 찻집에 스테이 공간을 만들 꿈을 가진

두번째 주인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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