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첫번째 옷
배냇저고리
: 깃을 달지 아니한 갓난아이의 저고리
이 골동품 같이 생긴 물건은 엄마가 지난 30여년 동안 고이 간직해 준 나의 첫번째 옷이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2년 전에, 안온한 엄마의 뱃속에서 나와 미지의 세계와 처음으로 조우한 한 아이가 중요한 울음을 터뜨리며 많은 사람들을 미소짓게 또 눈물나게 한 그 날에 즈음하여 입었던 옷이다.
오랜만에, 이 눈물과 콧물로 점철된, 누렇게 색이 바랜 이 옷을 꺼내어 놓고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이미 12시가 지났으니, 애석하게도 꽤나 많은게 용서되고 꽤나 많은 축하를 받으며 꽤나 많은 기프티콘을 받는, 1년 중 딱 하루 뿐인 그날이 벌써 지나고 말았다.
나의 생일이기도 했던 어제가 올해는 예년보다 더 애틋했던 이유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인 나의 짝꿍과 함께했기 때문이고, 우주보다 큰 마음으로 나를 품었던 우리 엄마의 생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음력으로, 나는 양력으로 쇘기 때문에 내 생일과 엄마의 생일은 붙어 있는 경우가 꽤 있었지만, 같은 날이었던 해는 - 내 기억에 의지하자면 - 올해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우리 엄마는 2년전 6월에 나와 영원한 이별을 했다.
나의 전공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듯, 로스쿨 실무실습 당시 지도변호사님도 우만동족발집에서 족발에 소맥을 마시며, 변호사 업계가 과거 보다 많이 힘든데, 왜 진로를 변경했는지 물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많이 아프셨는데, 제가 고치지 못했어요. 그래서 도망치듯 로스쿨로 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니 그제, 어제, 오늘 엄마 생각을 많이 한 것이다. 예전보다 엄마 생각을 많이 안하고 있는것 같다. 바쁘다는 핑계는 꽤나 여러 방면으로 유용함을 새삼 깨닫는다.
다시 돌아와서, 엄마는 수능날 여전히 젖내와 분유냄새가 날것만 같은 저 배냇저고리를 내 교복 안쪽에 꾀매주었다. 수능시험 당일에 입고 갈 교복자켓에 말이다. 내가 저 녀석의 존재를 인지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일종의 미신이었던거 같은데, 엄마는 배냇저고리를 꾀매 입고 시험을 보면 대박이 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나는 그 해에 나름 만족할만한 좋은 점수를 받았고, 고등학교 이과에서 수석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당당히 입학했다. 그러나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시험을 2번 더 봐서 3수를 했을때는, 수능에서 더 좋은 점수를 받아 넉넉한 점수로 한의과대학에 입학을 했으니, 배냇저고리의 기운이 적어도 3년은 이어짐에 틀림없으리라. (불과 40분 전만 해도 나의 생일이었으니, 이 정도 재수없음은 양해 바랍니다.)
우리 엄마는 내가 대략 19년 후에, 공부를 꽤나 잘 해서 서울대학교 공대로는 그다지 만족하지 못할 정도로 공부를 잘 할 것이라 생각했을까? 그렇게 생각해서 내 배냇저고리를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었을까?
우리 엄마는 그렇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가끔 충동적이고 순수하고 나만 보고 사는 그런 약하고도 강한 사람이었다.
오늘 오랜만에 배냇저고리를 꺼내어 보니, 엄마가 많이 아팠을 때가 떠오른다. 엄마의 정신이 흐릿해질 때 즈음, 엄마가 조심스레 내 방문을 노크했다. 뭐 그렇게 잘났다고, 나는 내 방에 들어올 때 노크없이 들어오는 걸 싫어했고, 짜증을 내기도 일수였다.
오늘 그때 그 조심스러웠던 노크소리를 돌이켜 생각해보니 엄마가 많이도 외로웠을 것 같다.
엄마는 양 손에 나의 배냇저고리를 들고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롱을 정리하다, 잠시 잊고 있던 나의 배냇저고리를 발견한 기쁨 때문이었으리라. 때가 타서 누렇게 변색이 된 게 못내 아쉽고 미안했는지 엄마는 나의 배냇저고리를 세탁하면 어떨까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잠시 후에, 엄마는 조심스로 다시 내 방을 방문했다. 왠지 안절부절 못한 모습에 놀란 나는 엄마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고, 엄마는 혹시라도 세탁을 하다가 옷이 상할까봐 너무 걱정된다며 울먹였다. 그리고 나도 눈물이 났다. 엄마한테는 걱정하지 말라고, 세탁하지 않고, 내가 가진 가장 비싼 의류 사이에 조심히 넣어두겠다고 했다.
제일 비싼 것 사이에 보관되어 있던 가장 귀한 것을 꺼내보니, 32년의 시간 동안 물리적, 정신적으로 많은 성장이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고백하자면, 나는 결코 모든 성장과 경험이 인생에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고, 씻기지 않는 상처 따위는 단지 해로울 뿐이며, 더 강해진다고 해서 내 삶이 귀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누군가에겐 나약하기 짝이 없는 생각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엄마와 나의 생일을 보내며, 정말이지 거대한 사랑은 계획적이지 않음을 느낀다. 무언가를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좋아서 보듬고 간직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엄마와 이별하고나서 내 심장을 나방이 파먹었을지 몰라도, 그래서 어딘가 구멍이 나고 그 사이로 전보다는 잦은 빈도로 짠내나는 무언가가 새어나올지 몰라도, 이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고, 온전히 나인 것이다.
내가 나를 오롯이 사랑하기까지는 앞으로 얼마의 시간일 필요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2년 전, 3년 전에 비하면 오늘은 나와 내 삶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엄마, 편히 쉬고 쉬어요. 나는 여기서 좀 더 놀다 갈게요!
- 4년 전 생일 즈음에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