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호, 극적으로 태어나다.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고 있었다.
어둠이 싫었기에 서둘러 터널 끝을 향해 달리고 싶었지만,
터널의 끝에는 끝없는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아무리 저항해보려 해도 시간은 무상히 흐른다.
무기력하게 터널이 나를 지나갔고, 터널 밖은 생각보다 밝지 않았다.
그리고 아내를 만났다.
아내를 보기 위해, 어깨 뒤를 향하던 나의 시선을 거두어 앞을 보았다.
그러자 세상이 조금씩 밝아졌다.
우리는 별처럼 뜨겁게 사랑했고, 4년 5개월을 가득 채운 후 결혼을 했다.
아내의 출산 예정일은 2021년 3월 1일이었다.
올해로 71세가 되신 아버지의 생신과 같은 날이었다.
아내와 나는 어떻게 이런 운명이 있냐며 기쁜 마음에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감정표현을 잘하지 않는 무뚝뚝한 아버지도 빙그레 웃으셨다.
아내는 출산 예정일 3주 전까지 열심히 일했고, 치열한 증인신문을 마지막으로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감동이(선호의 태명)는 머리가 임신 주차에 비해 조금 큰 편이었고, 체중도 3kg을 넘었기에 예정일 즈음에는 선호를 품에 안을 수 있을거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내려와 있지 않아서 아내와 나는 조금 초조해졌다.
아내는 건강하게 선호를 만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운동을 했고, 나도 퇴근 후에 종종 만삭인 아내와 산책을 했다.
때마침 아내와 감동이의 건강을 챙겨주시던 형이 달생산을 보내주셨고, 아내는 예정일에 맞추어 약을 복용했다.
3월 1일 아침 11시 즈음 이슬이 비쳤고, 나도 아내도 감동이가 무사히 내려와 주고 있음을 직감했다.
진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언제든 병원으로 출발할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했다.
아내는 홀로 오롯이 고통을 참아냈다. 이슬이 비치고 18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아내는 내 손을 잡았다.
진통 주기가 5분이 되자 아내는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오빠, 병원가자.” 고 말했다.
3월 2일 새벽 5시경 출산을 위해 병원으로 출발했다.
(어쩌면 선호는 할아버지의 생일은 오롯이 할아버지의 날이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아내는 가쁘게 숨을 고르며 분만실로 향했고, 나는 코로나 검사를 마친 후 결과를 확인한 후에 분만실로 들어갔다.
아내와 감동이의 건강상태를 주기적으로 확인하며 출산의 순간을 기다렸다.
고된 진통을 참고 있는 아내의 옆에서 초조한 마음을 감추려 노력했지만,
감동이가 이따금씩 심장박동이 약해지는 때가 찾아오자, 나도 아내도 의료진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감동이가 힘들어하는 상황이었고 자궁 경부도 상당히 열린 상태였기에,
주치의는 결단을 내려 아내에게 이제 힘주어 아기를 보자고 이야기했다.
나는 분만실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내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비명이었다.
“엄마! 힘빼세요, 힘빼세요!”
“다시, 힘!”
다시 아내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파열음을 내던 비명이 멈춘 그 순간,
한 참의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를 숨죽이게 한 고요 끝에,
코를 통해 차가운 공기를 처음 마신 선호가 ‘내가 이곳에 왔노라!’며 우렁차게 울기 시작했다.
‘산모의 비명, 고요, 아기의 울음’
그 어떤 연극의 클라이막스가 이보다 더 극적劇的일 수 있을까.
모든 삶은 죽음의 가능성을 껴안고 있기에,
각자의 탄생의 순간은 단지 임신까지의 기간, 임신의 기간, 진통의 시간, 출산의 방식에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 쉬운 임신, 쉬운 출산이란 있을 수 없고,
모든 탄생의 순간은 극적劇的일 수밖에 없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 아내의 손을 잡고 걷던 길에
눈 앞에서 별이 빛났다.
그 빛이 너무 밝아 잠시 주변이 보이지 않았고, 이내 고요가 찾아왔다.
나와 아내는 이마를 맞대고 40도의 눈물을 흘렸고,
짧고도 긴 고요 끝에 눈을 뜨니 우리의 품에서 선호가 앙앙 울고 있었다.
선호는 그렇게 극적劇的으로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