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10일 / MBCC, 코펜하겐, 덴마크
때때로 지구는 아주 작게 뭉쳐진다. 마치 종이를 작은 공 모양으로 구기는 것처럼, 어느 면이 어느 면과 맞닿을지 모르는 채로. 그리하여 우리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주 멀었던 사람들을, 그것이 물리적 거리이든 마음의 거리이든, 만나게 된다.
MBCC(Mikkeller Beer Celebration Copenhagen)는 지난 2012년 23개의 브루어리와 함께 시작한 이래, 해가 갈수록 그 규모를 키워왔고 올해는 약 100여 개의 브루어리(맥주 브랜드 정도로 생각하면 편하다)와 북유럽의 커피 브랜드, 와인과 사이더, 타투 브랜드 등이 함께 한다고 했다. 축제의 시스템에 대하여 먼저 짚고 넘어가자면, 일단 행사는 이틀에 걸쳐 시간대별 4개의 세션으로 진행된다. 즉, 올해는 10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한 세션, 오후 4시부터 오후 8시까지 또 한 세션, 11일도 같은 시간으로 두 세션, 이렇게 총 4개의 세션이라는 뜻인데 각각의 브루어리들은 세션이 바뀔 때마다 서빙하는 맥주의 종류를 바꾼다. (물론 핫한 맥주들은 세션 종료 시간과는 상관없이 순식간에 사라지기도 한다) 사전에 MBCC 공식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세션별 맥주 종류가 공개되었고, 사람들은 그 정보를 토대로 전략을 세운다. (맥주 종류가 너무 많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어디에 먼저 줄을 서야 하고 어떤 맥주를 집중적으로 마실지에 대한 전략이 필요하다)
티켓은 보통 세션별로 구매할 수 있는데, (Yellow, Blue, Red, Green) 일단 티켓을 구매하면 전용 유리잔을 하나 받은 후, 유리잔을 헹궈가면서 모든 맥주를 무제한으로 마실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 천국일 수 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니다. 조금 더 자본주의적으로, 더 비싼 티켓 3종류가 더 있는데, (3종류나) 4개의 세션에 전부 입장할 수 있는 핑크 티켓, 4개의 세션에 다른 티켓 소지자들보다 20분 일찍 입장할 수 있고 기프트 세트(기념 맥주, 에코백, 초콜릿 등이 포함된)와 골드 프린팅 잔을 받을 수 있는 골드티켓, 20분 일찍 입장과 기프트 세트, 플래티넘 프린트 잔과 더불어 사전 파티 초대권, 갖가지 한정 맥주 릴리즈 이벤트 우선 입장권 등이 따라오는 플래티넘 티켓이 그것이다. (해가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동시에 복잡해지고, 돈 냄새가 난다)
내 친구는 플래티넘 티켓 구매자였고, 나는 직원 할인의 은총을 받은 사치스러운 골드 티켓 구매자였으므로, (20분 이른 입장이 나에게는 가장 큰 메리트였다) 각자 플래티넘과 골드로 프린팅 된 잔을 받아 들고서 오전 9시 40분, 격전의 장소 문 앞에 섰다.
그리고 드디어, 문이 열렸다.
행사 장소는 천장이 높고 공간이 커다란 홀 같은 곳이었고, 각각의 브루어리 부스들이 촘촘히 이어지고 있었다. 널따란 공간의 중간중간 앉을 수 있는 테이블들도 비치되어 있었으며, 매우 효율적인 동선 안에 잔을 헹굴 수 있는 린서들이 놓여 있었다. (역시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니었을 테니) 문이 열리자마자 밀물처럼 밀려 들어온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올해 가장 주목받고 있는 브루어리의 부스 앞에 줄을 섰고, 나 역시 맥주가 동나기 전에 맛을 봐야겠다는 사명감으로 그곳에 합류했다. 한 세션에서 각각의 브루어리는 2종에서 3종 정도의 맥주를 서빙하는데, 전용잔에만 맥주를 받을 수 있어 사실 혼자 다니면 맥주를 많이 마셔보는 데 시간적 제약이 크다. 해서 나는 친구와 함께 다니며 각각 다른 맥주를 받아 서로 나눠 마셨는데, 시간이 갈수록 왜인지 모르겠지만 점점 일행이 많아졌다. (물론 한 가지 맥주를 많이 받아 천천히 즐길 수 있으면 더욱 좋겠지만, 축제이기도 하니 그냥 마셔보고 싶은 맥주들을 최대한 다양하게 마시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또한 줄을 서야 하는 부스가 많아, 조금 심심했기 때문에 앞뒤의 모르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다른 곳에서 받아온 맥주를 나누어 마셨다. (블루베리 라인 이후로, 맥주 때문에 줄을 선 모두는 그냥 친구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반 티켓을 가진 사람들까지 모두 입장하고 난 후, 시간이 흐르면서(나는 취하면서) 공간의 온도가 치솟기 시작했다. 가끔씩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많은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받은 전용잔을 실수로 깨뜨리면 새로운 전용잔이 제공된다. 맥주가 무제한으로 제공되는 행사라 정말 많은 잔이 깨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는 적은 숫자였다. 대단한 사람들) 나와 내 친구는 낯익은 사람들과 계속해서 인사와 맥주를 나누며 곳곳을 누볐다.
MBCC에 초대된 브루어리들은 국적도 각양각색인 데다 각자 개성도 뚜렷한 편이다. 게다가 브루어리 부스를 지키면서 맥주를 서빙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 브루어리의 브루어(양조사)이거나 파운더로, 단순히 맥주를 마시는 것 이외에 그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또 다른 재미 요소이다. (물론 사업적인 기회도 존재할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브루어리 부스에서 맥주를 받을 때면 마치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그들에게 애정고백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매우 덕후 같은 짓이었다.
어쨌거나 뭐 그런데, 올해 그 많은 루키 브루어리와 정상급 브루어리들 사이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브루어리가 있었으니, 바로 북한의 대동강맥주였다. 뻔한 라거겠지만 어쩐지 한번 마셔봐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부스로 향했는데, 양옆에 명성이 엄청난 브루어리 두 개가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동강 맥주 부스 앞의 줄이 가장 길었다. (다들 북한이 궁금하긴 한가보다) 언제나 새롭고 특별한 것을 좋아하는 Mikkeller로서는 올해 MBCC의 가장 좋은 마케팅 포인트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물론 북한 맥주 때문에 티켓을 사는 사람은 없었겠지만) 이것저것 다 떠나서 이슈는 잘 만드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줄을 서 있었는데, 내 차례가 오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북한 맥주를 마실 거라는 생각은 했지만, 북한 사람을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 한국어를 이해할 것 같은 분이 맥주를 서빙하고 계셨는데, 한국어를 하기에 어색하고 그렇다고 영어를 하자니 더 어색한 기분이 들어 이도 저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 내 뒤에 길게 늘어선 줄이 신경 쓰여 힘겹게 한마디를 꺼냈다.
“안녕하세요?”(한국어였다)
그가 나를 보며 웃었고, 이질적인 억양이 묻은 대답을 했다.
“반갑습니다.”
누가, 어떤 의도로 그곳에 북한 맥주 부스를 두었든, 그가 인사하자, 어쩐지 정말로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는 유창한 한국어로(그렇겠지 당연히) 그날 가지고 온 두 가지 다른 맥주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한 종류는 쌀로, 한 종류는 보리로 만들었다면서) 맥주를 건네받고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뒤돌아 오는데, 기분이 정말로 이상했다. 덴마크 한가운데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서인지, 평생 다른 나라로 인식해오던 사람과 모국어로 대화를 해서인지, 쫄아서인지(오랜 시간 받아온 교육과 몸에 밴 문화가 갑자기 어디 외출하지 않으니까) 모르겠지만 어쨌든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친구와 싱거운 라거를 몇 모금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한국인은 고사하고 아시안조차 극도로 적은 행사에서 영어를 조금씩 하며 서빙하시는 분은 맥주 공장 사람일까 외교관일까, 행사장을 돌아다니던 색깔 없는 표정의 아시안들이 일행인 것처럼 보였는데 그들은 뭐하는 사람들일까, 북한 분이랑 몇 마디 말도 하고 사진도 같이 찍었는데 갑자기 누가 나를 잡아가는 건 아닐까, 따위의 이야기를.
이런저런 생각들과 맥주들이 시간을 먹어치우고, 우리는 첫 번째 세션 종료 시간 전에 빠르게 행사장을 나섰다. 두 번째 세션이 시작되기 전에 한정 맥주 릴리즈 행사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집요한 열정이다) 날씨는 좋지 않았고, 비까지 내리는데 건물 밖에서 또다시 줄을 서야 했지만 블루베리 라인을 겪고 난 뒤라 나는 몹시 편안한 마음으로 립스틱을 고쳐 바르는 등의 여유도 부렸다. 내 뒤에 서있던 네덜란드 아저씨는 나와 이야기하다 내 앞니에 립스틱이 묻었다고 조용히 알려줬다. 다정한 아저씨였다. 플래티넘 티켓의 위엄으로 몹시 빠르게 먼저 맥주를 산 친구는 더 오래 줄을 서야 하는 나를 위해 비빔밥을 사다 주었고, (비빔밥이라니!) 덕분에 맥주도 사고 점심도 든든하게 먹은 후에 두 번째 세션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오후 세션은 오전 세션보다 더 빠르게 지나갔다. (사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그날, 약 70종가량의 맥주를 마셨고 쓰러지지 않았다. (성공적이었다)
오전 세션 중간쯤에 코트 체크 공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거추장스러웠던 코트를 데스크에 올렸다. 다른 이의 코트를 옷걸이에 걸고 있던 히피 같은 아저씨가 나를 보고 다가왔고, 나는 그에게 인사한 후 내 코트를 어떻게 맡기면 되는지 물었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는 ‘너 참 친절하고 예의 바른 친구구나.’라고 말하면서 내 코트를 옷걸이에 걸었고, 나는 조금 웃다가 이야기했다.
“저는 남쪽 한국에서 왔는데, 방금 북쪽 한국에서 온 맥주를 마셨어요. 맥주 주시는 분과 한국어로 이야기했는데,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어요. 저는 전쟁을 겪지 않았지만, 그래도 뭐랄까,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잖아요.”
나는 그때 조금 취했던 것 같았으나, 아저씨는 잠자코 내가 하는 말을 들어주었다. 별 것 아닌 제스처였지만, 나는 안심했고 고마웠다.
오후 세션 종료 후 흩어진 정신을 주워 담아 가까스로 행사장을 나서는데, 대동강 맥주 부스의 북한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고 말을 걸었다.
“내일도 오십니까?”
처음보다 훨씬 반가운 마음으로 나는 웃었고, 대답했다.
“네, 내일도 옵니다. 내일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