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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날 Dec 31. 2022

대설, 주의보

큰 눈이 내린 시골집을 덮은 OO 주의보

작은 텃밭 정원을 몇 년째 가꾸고 있지만 도통 자라지 않는 기술과 지식과 마음을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게으른 정원가의 24절기 활용법
대설(大雪): 양력 12월 7일이나 8일 무렵. 한겨울에 해당하며 농사일이 한가한 시기이고 가을 동안 수확한 피땀 어린 곡식들이 곳간에 가득 쌓여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당분간은 끼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풍성한 시기이다. 한편 이날 눈이 많이 오면 다음 해에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는 믿음이 전해지지만 실제로 이날 눈이 많이 오는 경우는 드물다. 출처: 한국세시풍속사전

시골집이 생긴 후로 여행을 잘 안 다녔어요. 어딜 가도 우리 시골집보다 풍경 좋고 마음 편한 곳이 흔치 않더라고요. 하지만 아주 가끔, 낯선 곳을 익숙한 친구와 동행하는 것은 즐겁습니다. 바람 많고 여백 많은 남쪽 바다에 다녀온 뒤 도시에는 첫눈보다 큰 눈이 내렸습니다.


걱정 주의보

시골집이 생기기 전에는 눈이 오면 마냥 좋았었습니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피할 길을 찾기 어려운 산길을 올라갈 걱정도 안 해도 됐고, 급경사를 내려오다 계곡으로 미끄러질 걱정은 안 해도 됐으니깐요. 시골집은 해발 350미터쯤 산 중턱, 산 넘어 물 건너야 하는 곳이라 눈이 오면 위험천만합니다. 눈이 많이 오면 아예 못 올라가고 아예 못 내려올 때도 있어요.


만반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차로 눈길을 내려오다 쭉 미끄러져 계곡으로 처박힌 이후로 조금은 소심해졌지만, 여전히 무모한 기질의 운전자는 철저히 준비된 차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올해 차를 장만할 때 필히 사륜을 고집했고, 이제 타이어를 바꿀 때입니다. 타이어 사이즈가 별나 엄청난 전화품을 판 후에 어렵사리 윈터 타이어로 교체했습니다.


시골집을 만난 후로 내가 스스로 건사하는 영역이 확장되었습니다.

내가 먹고, 살고, 이동하는 것들을 내 손으로 직접 챙기는 것은 참 기본적인 것이지만, 생각보다 어렵고 그래서 더 멋진 일이라고 느낍니다. 언젠가 부지런한 텃밭 농부로 성장하여 웬만한 먹거리는 자급자족하는 꿈을 살며시 꿔봅니다.


제설 주의보

큰 눈이 온 뒤 어렵사리 도착한 시골집은 새하얗게 변신해 있습니다.

이 놀랍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길 겨를도 없이, 재빠르게 제설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래야 집 앞 후룹라이드 경사의 개울을 건너 집 마당에 들어갈 수 있어요. 때 마침 읍내 철물점에 들러 넉가래와 빗자루를 사 온 덕분에 수월하게 쌓인 눈을 대충 옆으로 치우고, 길가에 배치된 꽁꽁 언 모래주머니를 땅에 탕탕 내리쳐 부슨 후 가슴에 앉은 채로 경사가 심한 쪽부터 모래를 뿌립니다.

후룹라이드 개울은 우리 집과 옆집만 지나는 길이라 마을 반장님의 제설차가 지나가지도 않는 길, 옆집이 오시지 않는 주말이면 30미터는 족히 되는 경사로의 눈을 꼼짝없이 홀로 치웁니다. 좀 고되기는 하지만, 눈이 와도 시골집에 올 수 있는 스스로의 역량과 노하우를 갖춰나가는 것이 뿌듯해요.


설렘 주의보

눈 덮인 시골은 은밀한 비밀과 생명을 간직한 듯 신비롭습니다. 한 뼘 넘게 쌓인 눈 밑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라요. 새하얀 눈을 어지럽힐 새라 눈 위 발자국도 남기지 않고 건물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다닙니다. 하지만 평소 소리 소문 없이 다니는 길고양이와 산짐승만이 눈 때문에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맙니다.


눈 위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을 보세요.

간혹 우리 집을 찾는 길고양이의 익숙한 동선으로 가지런히 찍힌 발자국도 보이고요, 가운데가 크게 갈라진 제법 큰 발자국도 보이는데, 고라니일까요?

방콕하고 있는 밤 동안 산짐승들이 우리 마당을 지나다니는 상상을, 잔디밭에 떡하니 있는 큰 응가를 보고 떠올려 보긴 했는데, 실제로 눈 위로 크게 찍힌 발자국을 보니 좀 우스스 하기도 합니다. 애초 산짐승이 살던 산 중턱에 사람들이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 것이니, 새하얀 눈밭과 새까만 밤은 이들의 차지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새하얀 눈 위로, 새까만 하늘에는
별들이 촘촘히 자리 잡고 반짝입니다.
설레지 않을 수 있나요?
깊어지는 겨울을 추앙합니다.



게으른 정원가의 '대설' 활용법

1. 시골집으로 안전한 이동, 차 건사하기

2. 큰 눈 맞이, 제설 기술 발휘

3. 눈 아래 곤히 잠자고 있는 자연을 추앙하기  

정원 나무에 덮어준 건초더미가 눈에 띄는, 눈이 덮힌 텃밭 정원 (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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