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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진 Oct 17. 2023

천만 원짜리 기타

    중학생 무렵 나는 플루트에 가장 큰 흥미와 재능을 보였다. 피아노는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생님이 외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고 가장 손에 익은 악기였던 기타는 학원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주위에서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그즈음 내가 다녔던 한인 학교의 음악 선생님은 내가 플루트 연주자로 대학에 진학하길 바랐다. 하지만 당시 나는 필리핀인 선생님에게 레슨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입시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랐고 딱히 상담할 곳도 없었다. 게다가 학교 행정에 문제가 생겨 어쩔 수 없이 국제학교로 전학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부모님은 “음악은 그냥 취미로나 했으면 좋겠다.”, “남자가 음악 하면 배고프다.”라고 하셨고 나는 그 말씀에 실망해 더는 음악에 흥미를 두지 않기로 했다. 그중 최악은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이혼하면서 극도로 불안정해진 내 가정환경이었다.


    외롭고 불안하던 시기 음악은 나에게 친구였다. 악기를 연주하면 그저 즐거웠고 음악을 들으면 마냥 행복했다. 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주위 어른들은 ‘진로’와 ‘대학 입시’로 나를 몰아세웠다. 그렇게 친구와 철없이 놀기만 해서는 안 된다며 말리는 것만 같았다. 모두 진심 어린 조언이었겠지만 예민한 사춘기였던 나는 부담감에 다 그만두고 싶었다. 때마침(?) 누군가 내 플루트를 몰래 만지다 바닥에 떨어뜨렸고 내 플루트는 망가졌다. 고치거나 새로 사려는 의지도 없이 나는 플루트를 그만두었다. (노파심에 이야기하지만 다른 사람의 악기에 허락 없이 손을 대는 건 굉장한 실례이다.)


    나는 성인이 된 후에 플루트를 그만둔 것을 아쉬워했다. 대학 진학이 목표가 아니었어도 즐겁게 연주했다면 어땠을까? 내 음악성은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때는 입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면 음악은 사치였다. 금전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굉장한 낭비였다. 주변 어른들은 악기 연습에 시간을 쓰기보다는 학교 성적을 위해 공부하기를 원했다. 초등학생일 때는 다양한 경험과 놀이의 관점에서 허락했는데 중학생이 되고부터는 책상 앞에 엉덩이 무겁게 앉아 공부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국제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음악 커리큘럼이 다양했다. 진지하게 음악을 할 생각은 버렸지만 좋아하는 마음만큼은 어쩔 수 없던 것 같다. 나는 합창부에 들어갔고 그중 더 재능이 있는 사람들로만 꾸려진 중창단으로 활동했다. 기타, 피아노, 플루트에 노래까지 좋아했지만 그중 어느 하나를 진로로 정할 만큼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진로를 고집할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그러다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3학년 때 나는 학교 축제에 기타 독주로 참가했다. 내 연주가 꽤 인상적이었는지 그 후 사람들이 나를 새롭게 바라보기 시작했다. 음악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은 내가 음대에 진학하길 바랐다. 그쯤 우리 학교에 미국 일리노이의 한 음대 교수가 방문했는데 음악 선생님은 나를 위해 적극적으로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음대 진학에 마음이 없던 나는 선생님의 체면을 생각해 마지못해 그 자리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그 교수는 내 연주를 듣고 말했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넌 왜 음악을 안 하려고 하니?”


    뜻밖에 그는 나에게 장학금과 함께 자신의 대학에 입학하라고 제안했다. 갑자기 진로가 결정된 듯 보였다. 그렇게 미국으로 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장학금 외의 유학비를 지원해줄 형편이 되지 않았던 어머니는 한국으로 진학하는 건 어떻겠냐고 하셨다. 집안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덜컥 한국에 혼자 입국했다. 하지만 이 선택으로 다시 음악을 그만두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입학할 대학을 알아보기 위해 한 친척의 주선으로 S대 음대의 기타 전공생을 만났다. 그는 내가 가방에서 기타를 꺼내 들자마자 빈정거리는 말투로 물었다.


    “부모님이 천만 원짜리 기타를 사줄 형편은 돼?”


    그는 다짜고짜 부모님이 고가의 기타를 사줄 형편이 되는지부터 물었다. 내 기타는 고작 몇십만 원짜리 낡은 기타였다. 그는 내 연주를 들어보지도 않은 채 입시를 포기하라고 말했다. 


    당시 나는 음대에 응시하는 한국 수험생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준비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필리핀에서는 나를 지도해줄 만한 사람이 없었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 검색만으로 웬만한 입시 정보를 구할 수 있겠지만 그땐 그럴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미국의 수많은 대학 중 한 곳에서 입학을 제안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가볍게 한국 입시를 생각한 것이다. 그땐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나고 보니 그 전공생이 오히려 나의 상황과 태도에 더 어이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딴에는 나에게 굉장히 현실적인 조언을 해준 것인지도. 하지만 한국의 입시를 전혀 몰랐던 나는 그 S대생의 말에 모멸감을 느꼈고 음대 입시를 포기했다. 음악과는 영영 결별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음악을 그만둔 것을 내 주변에서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한 것 같다. 부모님에게는 음악적인 흥미와 재능이 전혀 없었고 친인척을 살펴봐도 음악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런 집안에서 어떻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어?’ 나는 혼자 이상한 길을 가고 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음악을 그만뒀으니,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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