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스물아홉이 되던 해 나는 경기도 안성에 있는 대학의 실용음악과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음악을 좋아해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나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잔뜩 품은 채 다시 신입생이 되었다. 입시가 있던 겨울 실기시험이 한창이던 때 나는 여전히 일말의 확신도 없었다.
‘내가 군대를 다녀온 지 3년이 넘었고 1년 후면 서른 살인데 다시 대학생이 된다고? 그것도 편입이 아니라 신입생?’
그렇지 않은가? 스물아홉의 입시생이라면 적어도 장래가 촉망될 만한, 그러니까 의대나 법대 입학과 같은 대단한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운명적인 사명감이라도 있어야 나 자신을 설득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평범한 고3 수험생이었다면 어떻게든 합격해야겠다는 일념으로 한 학교라도 더 응시했겠지만 나는 무슨 배짱이었는지 딱 2곳만 지원했다. 게다가 실기시험이 있는 날 새벽까지도 확신이 없어 시험장에 가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당시 여자친구(이자 현재 아내)는 그런 나에게 엄포를 놓았다.
“이번에 합격하지 않아도 괜찮아. 내년에 다시 보려면 시험 유형과 시험장 분위기가 어떤지 알아두는 게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응시조차 하지 않으면 당신이랑 헤어질 거야.”
처음부터 재수를 염두에 둔 걸 보면 여자친구도 내가 합격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던 것 같다. 내 주변 사람들뿐 아니라 나 자신조차 이 길에 대해 확신 따위는 없었다. 게다가 입시를 준비한 기간은 고작 3개월 정도였으니 합격은커녕 응시조차 고민스러웠다. 나에게는 ‘음악을 하고 싶다’라는 불명확한 생각만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아찔할 정도로 답이 없는 철부지였다. 어쨌든 나는 시험을 치렀고 감사하게도 한 번에 작곡과에 합격했다. 그렇게 29살의 나는 10학번이 됐다. 벌써 14년 전의 일이다. 나는 지금 영상 음악 작곡가로 12년째 활동하고 있는 작곡가이다.
10여 년 전에 느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이제는 사라졌을까? 내 대답은 “전혀 그렇지 않다.”이다. 나는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만한 작곡가도 아니고 음악감독이 된 것도 아니다. 나는 내 분야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성장하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고 있는 프리랜서 작곡가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이 글을 쓰게 됐을까? 나는 ‘먹고 살기 팍팍한’ 음악 분야에서 아직 살아남아 있는 나의 경험이 자신의 꿈 앞에서 주저하고 있는 10대, 20대의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10여 년의 여정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많이 부족하겠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 가운데 한 명에게라도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이런 나의 오지랖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고 보잘것없어 보일 수도 있다. 혹여 그런 생각이 든다면 지금 여기에서 멈추고 귀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오랫동안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 앞에서 현실적인 계산이나 주변의 반대 때문에 주저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한 번쯤 자신을 믿고 기회를 주라고 말하고 싶다. 돈이 많지 않아도 된다. 심지어 나는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대신 꿈을 위해 스스로 많은 것을 포기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힘들어도 버틸 수 있는 깡도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반드시 길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10여 년 동안 나는 그렇게 살았고 성장했다. 물론 내가 걸어온 길이 정답은 아니다. 10명의 작곡가가 있다면 10개의 길이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스물아홉 살의 신입생이 되어서야 작곡가의 꿈을 찾고 이루었던 나와 같은 삶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