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진 Oct 22. 2023

돌아왔지만 헛되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땐, 태진이 형을 기억하렴.”


    학과 동기나 후배가 내게 고민을 털어놓을 때 자주 해주던 말이다. 우리의 인생은 다 다르다. 가정환경, 성장 과정, 타고난 재능, 신체 조건, 성격 등등 모두 다를 수밖에 없고 같은 목표로 모인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인생 이야기가 있다.


    29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됐을 때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이 학교를 다니기 위해 들이는 시간과 돈이 내 인생에 정말 도움이 될 것인가?’였다. 3년제 대학이라고 해도 32살에 졸업하면 그 나이에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막막했다.


    입학하고 보니 같은 과에 나보다 10살이나 어린 동기생도 있었다. 까마득하지만 학교에서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학우들이었고 그 중엔 정말 재능 있는 친구들도 여럿 보였다. 냉정하게 얘기하면 내가 그들과 똑같이 배우고 공부해서 3년 뒤 졸업할 때 똑같은 수준의 실력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내 나이가 될 즘엔 나보다 10년이나 더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에 매여서는 성공적인 음악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가끔은 ‘내가 그 나이 때부터 방황하지 않고 음악을 시작했다면 더 실력 있는 작곡가가 됐을 텐데.’라고 상상해본다. 지금 내 또래의 작곡가 중에는 나보다 5~6년 이상의 경력이 더 있거나 감독이 된 사람도 있다. 특히 여성 작곡가의 경우에는 더 많다.


    하지만 나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나는 나보다 어린 동기들보다 더 다양한 인생을 경험했고 들어본 음악의 종류와 양도 나이 차이만큼이나 많았다. 그 친구들이 앞으로 성장하며 부딪히게 될 문제를 나는 이미 겪었고 오랜 고민 끝에 음악을 하기로 다짐했기 때문에 내게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들이 평탄한 직선 코스로 음악의 길을 들어섰다면 나는 산과 바다로 돌아오며 이 길을 들어섰다. 그러는 동안 나는 그들이 아직 보지 못한 들에 핀 예쁜 꽃과 바닷가의 멋진 파도를 보며 오지 않았나!


    게다가 나는 어려서부터 기타, 플루트, 피아노를 배웠을 뿐 아니라 합창단으로도 활동했고 교회 찬양팀에서 베이스도 연주한 적이 있어서 현악기, 관악기, 건반악기, 성악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작곡하는 데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작곡가로 일하는 지금 어릴 적 접했던 악기들은 아주 유용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토익점수만으로 대부분의 영어 수업을 패스할 수 있었고 자퇴한 대학교에서 이수했던 교양 과목의 학점도 인정됐기 때문에 동기들보다 음악에 집중할 시간이 더 많았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보니 나는 내가 대학에 온 이유가 분명해졌다. 첫째는 어차피 늦었으니 조급해하지 말 것, 그러니까 성적에 크게 연연해하지 말고 ‘배움’ 자체에 집중하며 음악을 즐기는 것이었고, 둘째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수업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임했더니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왔고 한두 학기를 제외하고는 성적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 차이 때문에 날 어려워하던 동기나 교수님과도 특별한 목적 없이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학교에서 맺은 인간관계는 정말 큰 도움이 됐다. 나는 학과 동기의 소개로 실용음악학원에 출강하며 당시 생계를 해결하기도 했고 가깝게 지내던 교수님을 통해 드라마 작곡가로 데뷔할 수 있었다. 작곡가로 일하며 내 곡의 연주나 노래를 부탁할 사람도 먼저 동문을 통해 찾아본다. 학교에서 만났던 인연은 재학 시절이나 졸업 후에도 중요하다.


    늦었다는 생각에 조급해질 때면 어떤 식으로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서 내가 가진 단점보다 장점을 찾으려고 애썼고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런 사고방식은 내가 성장하는 데에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했다. 꿈 앞에 스스로 작아지거나 남보다 뒤처진 것 같아서 도망치고 싶을 때, 그 압박감을 앞으로 나아가는 힘으로 쓰길 바란다. ‘100세 시대’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요즘, 인생을 하루로 비유한다면 29살은 아직 오전의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다고 내 하루를 다 망칠 수는 없다.

이전 08화 스물아홉 살의 신입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