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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진 Oct 22. 2023

지금은 어설퍼도 괜찮다

    작곡 전공생은 학기 말에 주제 장르에 맞는 음악을 작곡하고 발표하는 과제가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기말작품, 즉 ‘기작’이라고 불렀다. 발라드, 댄스, R&B, 오케스트레이션 등등 학기마다 다양한 장르가 주제로 주어졌고 여러 교수님과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음악을 함께 듣고 평가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작곡 전공생들에게는 그 어떤 강의나 과제보다 중요한 시간이었고 그만큼 부담감이 컸다. 학기 중에도 이번에는 어떤 음악을 만들기로 했는지가 우리의 주된 대화 주제이자 안부 인사가 될 정도였다.


    2학년 1학기의 주제는 오케스트레이션이었고 나는 퓨전 사극풍의 오케스트라 곡을 만들기로 했다. 나는 어려서부터 사극 드라마를 좋아했고 퓨전 국악의 주제음악이 늘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 그런 곡을 작곡할 수 있기를 바랬던 것 같다. 하지만 막상 과제로 정하고 나니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무척 고민스러웠다. 사실 과제로 주어지기 전까지는 ‘언젠가’였을 뿐이었지만 기작으로 정해지니 당장에 해결해야 할 눈앞의 문제가 되었다. 강력한 동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어느 때보다 더 진지했고 무엇보다 밥이 되든 죽이 되든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했다.


    ‘창작의 고통’은 말로 형용하기 어렵다. 다른 사람이 그 감정을 오롯이 이해해주거나 대신해줄 수 없다. 음악적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욕구는 자연스러운 감정이지만 결과물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생각보다 인위적이고 굉장한 집중력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작곡을 위해 멋진 레퍼런스를 찾을 수도 있고 자신의 구상을 그럴싸한 말로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작곡가로 만들어주는 건 완성된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내 입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귀에 전달되는 것이다. 내 의도가 별다른 설명 없이 듣는 사람에게 느껴진다면 좋은 작곡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작곡 전공생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평상시에는 일반인은 잘 모르는 명곡을 즐겨 들으며 ‘언젠가 나도 이런 곡을 만들 거야.’라는 생각에 취해 나만의 세상에 빠져 살다가 제출기한이 가까워지면 마치 ‘위대한 작곡가’가 된 것처럼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한다. 그리고 시간은 자꾸 가는데 애써 정한 레퍼런스나 이미 작업한 곡을 뒤집기 일쑤다. 결국 기한을 며칠 남기고 나서야 밤샘하며 ‘자신의 현실과 수준’을 반성하고 벌겋게 충혈된 눈과 몽롱한 정신으로 겨우 과제를 제출한다. 아쉬움도 잠시, 마감 기한에 맞춰 제출했다는 성취감에 뿌듯하다.


    처음 결과물은 대부분 어설프고 완성도가 떨어진다. 막 완성한 시점에서야 성취감으로 스스로 대견해 보일 수 있겠지만 시간과 함께 경험이 쌓이면 자신의 곡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날이 온다. 그러니까 나의 과제 곡을 졸업 후에는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지 않거나 떠올리면 ‘이불킥’을 하고 싶어진다는 뜻이다. 물론 내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첫 결과물이 있었기 때문에 그다음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통스러워도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경험을 꾸준히 쌓아야 성장하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장황하게 묘사했지만 이런 모습은 현역 작곡가로 일하고 있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12년차 작곡가인 나도 여전히 작곡이 힘들어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마감 기한을 코앞에 두고 미루고 미루다 머릿속이 터질 것 같은 상태로 건반 앞에 앉는 일이 허다하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좋아서 선택한 일이고 내가 사랑하는 일인데.


    2학년 1학기 말에 나는 사극풍의 오케스트레이션 곡을 제출했다. 그 과정이 생각보다 재밌었고 결과물도 꽤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후 있었던 작곡과 전체 모임에서 한 교수님은 내 음악이 감동적이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 다시 그 곡을 들어보면 여러 면에서 부족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게 해준 의미 있는 과제였다.


    진로 고민도 창작의 과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신중하게 고민해야 하지만 반드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 지금 선택이 감사하게도 정답일 수도 있고 지금은 틀린 것 같아서 좌절할 수 있지만 막상 시간이 지나고 보면 정답일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원하는 꿈에 가까워지는 것을 설명하고 싶었을 뿐 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막연하게 고민하며 미루기보다는 어설프더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시도해보면 어떨까? 그 경험이 쌓여 진로에 대한 확신이 생길 수도 있고 다른 길을 찾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작곡도, 꿈도 포기하지 말고 완성도를 높여가자. 지금은 어설퍼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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