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봉투

by 맨오브피스

한국에서 은행 계좌를 여는 과정을 떠올려 보자. 신분증을 들고 은행으로 간다. ‘계좌 만들러 왔습니다.’라고 말한다. 몇 가지 서류에 서명한다. 짜잔! 하고 나의 이름이 적힌 계좌가 만들어진다.


독일에서 계좌를 열려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귀찮은 절차가 많기 때문이다. '보안'이라는 신성한 이름 아래, 절차를 꾸역꾸역 지켜야 한다.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월세집에 입주한 다음 거주 등록을 하는 것이다. 거주 등록을 하려면 구청(Bürgeramt)에 방문 예약을 해야한다. 예약이 밀려 있는 게 일상이라 2~3주 후에나 가능하다. 거주 등록 후에는, 거주 등록증과 여권을 들고 은행에 가서 계좌 신청을 한다. 그러면 바로 계좌가 만들어지느냐? 아니다. 신청이 접수되면 우편으로 계좌 정보가 날아온다. 그리고 며칠 후 임시비밀번호가 날아온다. 다시 며칠 후 계좌와 연동된 실물 카드가 날아온다···.


오래 걸리고 복잡하다. 고맙게도 복잡한 부분은 같이 사는 한국인 집주인이 해결해 주었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만큼은···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 모바일 앱으로 계좌를 여는 서비스도 등장하였으나,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렇게 보편화되지는 않았다)


그러다 문제가 생겼다. 월급날이 되었다. 인사부가 나의 은행 계좌를 알려달라고 했는데, 나에게는 아직 계좌가 없었다. 어떻게 할지 상의한 끝에 월급을 현금으로 받기로 했다. 현금이라니. 어머니가 경리로 일하던 젊은 시절, 월급날이면 사무실 앞에 트럭이 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트럭에는 돈 다발로 꽉 찬 쌀자루가 한무더기 쌓여 있었다. 직원들이 쌀자루를 탈탈 털어 지폐를 쏟은 후 사무실로 옮기면, 경리부 직원들이 노란 봉투에 직원들의 월급을 넣었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이야기가 추억처럼 떠올랐다.


재무 담당의 자리로 가니 그가 씨익 웃으며 나에게 하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월급명세서와 현금이 들어 있었다. 그가 손글씨로 뭐라고 적힌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월급을 수령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문서에 서명한 뒤 휴게실 소파에 풀썩 앉았다. 그리고 조용히 돈 다발을 꺼내 월급명세서에 적힌 금액과 일치하는지 확인했다. 센트 단위까지 정확히 들어있었다. 돈을 세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표정이 음흉해졌다. 나는 이제 베를린의 납세자였다.


당장 필요한 만큼만 지갑에 챙기고 나머지는 도로 봉투에 넣어 다시 재무 담당을 찾아갔다. 혹시 본사의 금고를 빌리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 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유럽 관광지에는 소매치기가 득실득실하다. 베를린도 예외는 아니다. 자유와 예술과 역사가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 베를린에는 소매치기도 가득하다. 그런 놈들에게 나의 피 같은 월급을 노출시키기 싫었다. 재무 담당도 나의 의견에 동의했다.


한동안 나는 본사 금고를 나의 입출금 통장으로 사용했다. 돈이 더 필요하다고 외치면 재무 담당이 현금을 꺼내줬고, 잔액을 종이에 기록했다. 그가 새로운 잔액을 적을 때마다 그 옆에 서명해야 했다.


남들은 다 월급을 계좌 이체로 받을 때 나만 현금으로 받는다는 사실이 은근히 재밌었다. 술 마실 때 하기 좋은 이야깃거리였다. 재무 담당이 본사 금고를 열 때마다 안에 뭐가 들었나 엿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금덩이가 들어있는 것을 기대했지만 아마 없었던 것 같다(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후에 새로 입사한 사람들이 계좌를 만들지 못해 나와 똑같은 상황에 처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 이들에게는 맥주를 쥐여 주며 느려터진 독일 시스템을 욕하는 것에 공감해 주었다. 공통의 적이 있으니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나는 가을이 되어서야 계좌로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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