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쌍계초등학교에서 급식소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종종 일을 나가시곤 했다.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해 영양사 자격증이 있는 우리 엄마는, 그 당시 우리 집이 녹차 일만 해서 생활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녹차 철이 아닐 때에는 급식소에서 일을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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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은 녹차 철이 아닌 2월과 3월에 한다.
'아빠가 언제 오지...... 아빠가 안 오는 걸까?'
유치원 졸업식날, 부들부들 잔뜩 긴장한 몸으로 아빠를 기다렸다. 내가 다녔던 왕성분교는 친구들이 10명도 채 되지 않은 작은 학교였다. 친구들의 엄마들은 고운 한복을 입고 다들 오셨는데, 우리 엄마는 오지 않는다. 대신 아빠가 오기로 했다. 왜 안 오지. 졸업식은 끝나가는데 아빠가 오지 않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그때였다.
툭 툭 툭 툭
복도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승희야. 아빠가 많이 늦었지? 선물 사느라고. 하동읍내를 아무리 돌아봐도 선물 살게 마땅치 않은 거라."
기뻤다. 모든 친구들과 엄마들이 아빠를 쳐다봤다. 아빠의 두 손에는 꽃다발 하나와, 노란색 별 모양의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된 선물이 있었다.
"우와 승희 좋겠네. 꽃 하고 선물도 받네. 우리는 이런 거 생각도 못했는데~ 아빠가 너무 멋지신 거 아이가."
옆에 있던 친구 엄마가 한 마디 하셨다. 선물을 뜯어보니 '동요 메들리' 테이프였다. 사실 어렴풋이 기억이 나서 동요 메들리였는지, 크리스마스 캐럴이었는지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는 이미 지났을 2월이어서 동요 메들리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다음 달에는 초등학교 입학식을 했다.
이 날도 역시, 모든 친구들이 엄마와 기념사진을 찍는데 나는 아빠와 함께 찍었다.
물론 나도 엄마와 찍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엄마는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녹차 일을 하면서 그렇지 않은 날에는 급식소를 다녔다. 동생과 나는 학교를 마치고 늘 바로 옆 학교인 쌍계초등학교까지 걸어가서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엄마는 일을 마치고 나와,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는 우리를 꽉 안아주며 가는 길에 맛있는 과자를 사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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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때 급식소 다닐 때 어땠어? 좋았어?"
"좋았지. 그때는 녹차 일만 해서 먹고살 수가 없어서 힘들었어 엄마는. 고정적인 수입이 없으니까. 살려고 한 거야.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그래서 좋았어. 내가 일을 하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 엄마 많이 힘들었겠다. 그래 봤자 지금 내 나이 정도였는데."
" 그래도 승희야. 그 시간들이 다 지나가고 지금은 이렇게 좋은 날이 오네."
엄마와 아빠의 노력으로 이렇게 키워진 내가,
이제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엄마 아빠를 바라본다.
유치원 졸업식과 초등학교 입학식. 내 생에 처음 있는 졸업과 입학을 엄마가 아닌, 아빠와 함께해서 특별한 추억이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다.
엄마가 되고 보니, 그때 엄마 아빠가 어떤 심정으로 어떤 대화를 했을지 상상을 해 본다. 아빠는 엄마가 일을 해야 한다는 게 조금은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고, 엄마도 어려운 경제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엄마는 내 졸업과 입학식에 못 온 것을 미안해하고 아빠는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 위해서 다른 친구들 엄마가 준비하지 않은, 특별한 선물을 사 왔다. 생활은 가난했지만, 마음은 가난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나와 내 동생은 가난을 느낄 새도 없이, 마음이 풍족하게 자랐다.
어느덧 나의 큰 딸, 아빠의 첫 손녀 윤하가 7살이 되어 내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나는 윤하에게 어떤 기억을 심어줄 수 있을까?
어떤 선물을 주면 좋을까?
서른이 된 지금, 그 시절 아빠의 손에 쥔 작은 테이프 하나가 지금껏 나에겐 소중하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의 엄마 아빠와 비슷한 나이가 된 내가, 과거의 책장을 펼쳐 엄마 아빠를 쓰다듬어줄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수야 근영아. 형편도 넉넉하지 못한데 아이들 키우느라 많이 힘들지? 조금만 더 힘내고 버텨봐. 난 미래에서 온 사람이거든. 분명 너희에게도 너희 가족에게도 좋은 날이 올 테니 나를 믿고 조금만 더 열심히 살아봐. 너희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