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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정해진 곳이 없이 떠다닌다.

2024.06

by 만수당

물은 정해진 곳이 없이 떠다닌다.

먹는 물도 그랬다.
어릴땐 엄마가 끓여주었던 보리차나 옥수수차, 결명자차 등 각종 차를 식수로 마셨고
혼자 떨어져 살게 된 대학 시절부터는 정수기 물이 내 주된 식수가 되었다.

그러다 한 사오년 전 쯤부터는 생수를 사다 마셨고
쌓이는 생수병을 처리하기 귀찮아져 브리타 정수기를 사서 편하게 음용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맹물의 맛이 싫어져
다시 차를 보리차나 옥수수차 등 차를 끓여 마시기 시작했다.

조금 귀찮긴 하지만, 그리고 물이 쉬어버리면 낭패지만.

매일 매일 2~3L 정도의 물을 끓이고 마시고 내보낸다.

그러다보니 가끔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다가도 잡생각을 많이 하곤하는데
오늘은 커피포트 뚜껑을 닫은 채로 물을 받다가 얼굴과 가슴에 물이 튀었다.

생각 좀 하고살자.. 라고 자책하다가
그래도 이게 물이었으니 다행이지,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만약 물이 아니었다면.
내가 물인줄 알고 철철 부어댔던 것이 똥물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리고 만약 뚜껑이 닫혀 있지 않았더라면!

뚜껑을 열고 받는 것과 뚜껑을 닫고서 받아내는 것.

내가 받아낼 것이 깨끗한 물이라면 뚜껑을 닫고 받는 것만큼 멍청한 일이 없겠지만
내가 받아낼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면 멍청한 줄도 모른 채 독약을 마셨겠지.

살다보면 그럴 법도 하다.

내가 배우고 있는 것, 하고 있는 일, 만나는 사람 모두가 그렇다.
먹기 전까진, 아니 먹는다해도 내가 다시 내보낼 때까진 아무 것도 모른다.

물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아니다 싶을 땐, 뚜껑을 머리 위에 쓰는 것도 필요하겠다.

뭐, 잘못된 신념으로 패가망신한 사람 한 둘 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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