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2년을 담담히 그려내었던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의 도입부다.
스물한살때였나. 우연히 기회가 되어 아는 작가분이 부른 술자리에서 갔는데 낯익은 얼굴이 술잔을 앞에 두고 담배를 피워대며 눈을 감고 있었다. 술잔 옆 아무렇게나 만들어 둔 재떨이엔 꽁초 예닐곱 개가 허리를 굽힌 채 검게 자신의 마지막을 물들이고 있었다.
작가의 글을 좋아했던 나는 반신반의하며 혹시 김훈 작가님 아니시냐고 같이 간 작가분께 조심스레 여쭸고 그걸 들었는지 그러는 너는 누구냐는 답변이 담배연기를 타고 내게 올랐다.
근 십여 년, 김훈 작가의 글을 좋아한지 십여 년만에 처음 대면한 순간은 그렇게 유쾌하지만은 않게 시작했다.
2004년, 노무현 전대통령의 탄핵 열풍일 때 칼의 노래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소추되고 헌재에서 탄핵소추안이 기각되기까지 권한이 정지된 두달 동안 대통령이 읽었던 책으로 유명해진 것이다.
그 후 동년 9월,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의 원작으로 이름이 다시 알려지며 칼의 노래는 다양한 버전으로 시장에 나왔다. 그리고 첫 문장에서 손을 떨었다.
버려진 섬마다 꽃'은' 피었다. 라고 썼던 것을 며칠 간 줄담배를 피워대며 장고한 끝에 바뀐 문장이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이다.
버려진 섬은 파직을 당해 백의종군한 이순신의 마음일지도, 그가 없는 동안 더 잔인하게 밟힌 조선땅일지도 모르겠다. 버려진 섬에 핀 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어난 희망이고 다시 돌아온 승리의 예고였다. 하지만 '은'에서 '이'로 바뀌며 희망은 전란 속 조선사람이 기대한 종전의 기대에서 그저 담담한 이야기로 바뀐다. 김훈 작가가 본 충무공은 그러한 사람이었다. 진실로 싸워 이기는 것 위에 담담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다음을 만드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난중일기의 문체는 꾸밈없이 담백하다. 슴슴한 평양냉면같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고 겪었던 상황에 대해 아름답게 분칠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명량대첩에 대해서도 자신의 뛰어남을 적지 않고 그저 천행이었노라고 마무리한다.
기자 출신이었던 김훈 작가는 그래서 날카롭고 매서웠다. 그의 작품을 좋아해 많이 읽었다고 자부하였지만 팬으로서의 질문도 하기가 어려울만큼 완고해보였고 단단했다.
깊게 고민한 끝에 떨림을 물고 질문을 드렸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답게 글을 쓰시나요? "
그러더니 김훈 작가가 나를 빤히 보시더니 딱 한마디 하셨다.
"질문이 틀렸어."
나는 당황하여 작가라면 어떻게 질문하셨을까 하고 다시 물었다.
"문장을 그리실 때, 필요한 단어를 어떻게 두어야 할까요?"
"문장을 왜 그려? 쓰는게 아니고?"
"선생님 문장은 보면서 바로 눈앞에 떠오르니까요, 그래서 그린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그 말에 작가님은 한 번 웃으시더니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셨다가 답을 이어주셨다.
"문장을 그릴 수 있으면 좋지, 그러려면 책을 많이 봐."
너무 뻔한 소리라 날 너무 애송이취급하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다.
"그냥 책 말고, 자네가 쓰려는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책을 많이 읽어봐, 그리고 국어사전부터 찬찬히 읽어봐."
한참 글을 쓸 때 국어사전을 보며 재밌는 순우리말 단어를 찾아 쓴 기억은 있지만 내가 쓰려는 이야기를 알 수 있는 책이라 하니 당황스러웠다.
나중에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내가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쓰고 싶거든 난중일기부터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된 수많은 장계며 기록들, 난중잡록이나 징비록에 담긴 장군의 모습 등 이순신과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
살아있는 기록이 그러하였고 만들어 낼 이야기도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박범신 선생님 집필관에 가면 항상 책상에 소금에 관한 책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소금 공부는 왜 하세요? 하시면 "소금을 알아야 소금을 쓰지~" 라고 답해주셨다. 그리고 다섯 달 정도 지난 후에 소설 '소금'이 출간되었다. 소설에 소금에 관한 이야기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진 않는다. 그러나 소금에 대한 공부가 없었다면 소설을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되면 가시는 히말라야에 관한 경험없이 촐라체가 쓰이지 않았을 것이고 노년에 관한 감상이 없고서 당신이란 작품도 나오지 못하였을 거다.
내가 만나본 작가들은 모두가 고민하고 공부하는 분들이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한량같이 세상을 떠도는 것 같지만 그 모든 것이 공부였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는 것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꼭 글만이 아니더라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았다. 제조업체에서 가져온 도면과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조언해주기 위해서는 공학개론부터 시작해 규격서의 내용 및 의미를 공부하는 것이 좋았다. 근태관리 솔루션을 영업하기 위해서 근로기준법을 공부하고 사례연구를 통해 같은 법조문이라도 다르게 적용되는 순간을 알아야 하는 것이 유리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누구나 어느정도는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하든 그 일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배워서 어느 하나 도움되지 않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격증을 가져야만 배우는 것이 아니고 전문 용어를 머릿속에 줄줄이 외운다고 배운 것이 아니다. 어떻게 쓰이는 지 내가 알고 내가 베풀 수 있으면 충분하다.
버려진 섬에 꽃이 피었듯, 이제 내버려둔 머릿속에 꽃을 피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