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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같지만 여럿이다.

2024.07

by 만수당

단 하나의 일도 성공하기 위해선 여러 고민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고전은 편향적으로 해석되오곤 했다. 손자병법 모공편의 '지피지기 백전불태'는 어느새 '지피지기 백전백승'으로 잘못 알려졌고 삼십육계는 손자병법과 동일시되기도 했다. 그런 까닭에 '손자병법에도 36계 줄행랑이라고 했어~' 식의 말이 나오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많은 오해가 또 얼마나 쌓여있을 지 모를 일이다.

삼십육계는 남북조시대, 단도제라는 장수에 의해 편찬되었다고 하나 사실은 아닐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각 계책에 인용되는 사례를 볼 때 아마 빨라도 송나라, 늦으면 명나라 정도에나 현재와 같이 정립되었을 것이다. 다만 단도제가 서른 여섯가지의 계책을 고안했다고는 한다. 그게 지금의 삼십육계와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삼십육계는 중국 병략의 정수를 담아낸 귀중한 책으로 현대 경영이나 영업 전략에도 귀중히 쓰일 책이다. 손자병법이 전략의 정수라면 삼십육계는 전술의 정수다. 그런데 병법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각 상황에 맞는 하나의 전술이나 전략만이 유용하다고 착각을 하곤 한다. 하지만 대다수의 성공에선 여러 전략이 복합적으로 활용된다. 흔히 말하는 '연환계'이다.(36계에도 연환계 챕터가 따로 있긴 하다.)

우리 역사속에서 삼십육계가 가장 다채롭게 쓰인 전쟁을 하나 꼽아보자면 백제 멸망전을 들 수 있다. 백제 멸망에 대해 나당연합군은 아주 치밀하게 전략을 세웠는데 삼십육계에서 이를 적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1. 반간계 : 백제와 신라의 연이은 전쟁 중, 부산현(지금의 부산은 아니다.) 현령이었던 조미압이라는 인물이 백제에 포로로 잡혀 좌평 임자의 종이 되었는데 천신만고끝에 탈출해 김유신에게 돌아갔다. 김유신은 다시 돌아가 임자에게 '백제에게 신라가 망하면 그대가 나를 보살펴주고, 신라에게 백제가 망하면 내가 그대를 보살펴줌이 어떠하냐'는 말을 전하게 했다. 조미압은 그대로 말을 전했는데 임자는 이를 처벌하기는 커녕 묵인한다. 이후 조미압은 백제 내부의 여러 주요 정보를 빼돌린다. 지금으로 치면 장관집에서 숙식하는 직원이 간첩인 셈이다. 이후 백제 멸망 뒤 당나라가 정림사지 석탑에 새겨넣은 '나라 안으로는 요부를 믿고'라는 구절에 소설적 상상력을 곁들여 김유신이 미인계를 활용했다는 상상도 있다.

2. 만천과해 : 나당연합군은 백제 정벌에 대한 의지를 공표하지 않았다. 원정군이 당나라에서 출병하기 직전, 일본의 사신이 당에 와있었는데 당은 기밀이 새어나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백제와 긴밀했던 일본의 사신을 억류하였고 대대적인 고구려 공격을 하겠노라고 떠들고다녔다. 당의 대규모 함선 건조 및 병력 이동은 백제도 알고 있었지만 백제를 침공할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3. 성동격서 : 660년 6월, 신라군은 지금의 이천인 남천정까지 진군했고 당군은 인천 덕적도에 기항한다.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이 과정에서 당연히 나당연합군이 그동안 침공하지 않았던 남쪽 루트로 진격해오는 줄 착각했다. 당시 고구려의 요동은 60여 년간 이어진 전쟁으로 토지가 황폐화되었고 사실상 고구려를 먹여살리는 밥줄은 지금의 황해도 일대였으므로 나당연합군이 황해도 방면으로 침공하는 것은 전략적으로 이상할 게 없었다. 이후 작전을 합의한 나당연합군은 각각 백제의 수륙통로인 기벌포와 탄현으로 순식간에 밀고내려온다.

4. 고육계 : 660년 7월 10일까지 사비성 앞에서 나당연합군이 합류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황산벌에서 계백의 군대와 마주친 신라의 군대는 고전을 면치 못해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지고 말았다. 이에 김유신의 조카인 김반굴과 좌장군 품일의 아들 관창이 필마단기로 백제 진영으로 돌격해 죽음을 맞았고 결국 최고위층이 먼저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자 신라군의 전의가 상승, 결국 백제군을 패퇴시키고 사비로 진군할 수 있게 되었다.

5. 금적금왕 : 나당연합군은 기존의 전쟁과 달리 백제의 주요 요충지를 모두 점령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비성으로 직공하였고 의자왕이 웅진으로 도주하기는 하였지만 웅진성주였던 예식진이 의자왕을 배신해 결국 의자왕을 잡고 백제 멸망을 선언하게 된다. 황산벌 전투가 7월 9일, 의자왕의 항복이 7월 18일로 고작 열흘 남짓한 시간에 7백년 간 이어온 백제는 그렇게 멸망하고 말았다.

물론 이후로 3년여 간 백제부흥전쟁이 벌어지긴 하였지만 이미 멸망한 나라의 깃발을 다시 세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나의 전략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이렇듯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고 활용된다.

경영은 전쟁과 다름 없다. 전략이란 말이 그래서 쓰인다. 그런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면 전략을 아예 모르는 것과 다르다. 현대 사회는 천년 전 전장의 상황보다 변수가 훨씬 더 많다. 연관되어 있는 이해 관계자의 숫자부터 만리 밖의 문제가 몇 년간 우리 머리를 놔주질 않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이를 파악하고 분석하는 데 드는 시간은 찰나에 그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들 중 대부분은 중대한 문제를 사소하게 생각하곤 한다. 당장 매출이 나오지 않는 이유는 세일즈를 못해서, 마케팅을 못해서와 같이 단편적인 이유가 아니다. 직원들이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지지 못하는 것도 단순히 연봉이 적어서뿐만은 아니다. 회사의 주가가 하락하는 데엔 하나의 변수만 작용한 게 아니다.

하나의 성공이 있기 전까진, 수 없이 많은 고민이 수반된다.
분석이 쉬워졌다고해서 문제를 해결할 열쇠도 하나로 줄어든 건 아니다.

책임질 것이 많은 자리에 있을수록, 더 넓고 더 깊고 더 다양하게 들여다보고 고민해야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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