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만사人事萬史
우리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군주로 손꼽히는 세종대왕.
많은 사람이 세종을 말하며 ‘애민정신’과 ‘학문 발전’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자주 놓치는 점이 있습니다. 그가 이 모든 업적을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은 바로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세종대왕의 리더십은 단순히 명민한 결단력과 애민정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는 태종의 강력한 왕권을 물려받아 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인사관리’를 극도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아버지 태종과는 달리, 때로는 태조 이성계처럼 인재를 아끼고, 때로는 태종 이방원처럼 결단력을 발휘했습니다. 이러한 균형 잡힌 리더십은 그를 단순한 성군(聖君)을 넘어 시대를 초월한 리더로 만들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세종대왕의 인사 관리 방식과 그의 사람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의 뒤편에 숨겨진 결단력을 살펴보려 합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선은 태종 이방원의 강력한 왕권 아래서 안정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태종의 방식은 피로 점철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왕권은 안정적이었지만 대신들의 자발적 협조는 부족했습니다. 세종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철학을 가지고 왕권을 운영합니다.
바로 ‘포용과 배려, 그리고 철저한 기준’을 바탕으로 한 인사 정책입니다. 세종은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거나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능력과 성품, 그리고 공과를 철저히 따져 사람을 썼습니다. 그의 인사 철학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능력 중심의 등용
2. 교육과 육성을 통한 인재 양성
3. 단호한 결단
이 세 가지 원칙은 세종이 어떠한 방식으로 사람을 대하고, 또 어떻게 조직을 운영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세종은 관료체계 안에서 철저히 능력 중심으로 사람을 등용했습니다. 이는 그가 여러 계층에서 골고루 인재를 발탁한 사례를 통해 잘 드러납니다.
먼저 장영실은 세종대왕의 사람 사랑을 상징하는 대표적 인물입니다. 원래 노비 출신이었던 장영실은 세종대왕이 그의 과학적 재능을 알아보고 적극적으로 등용했습니다. 조선 초기 유교적 이념이 강하게 자리 잡으면서 신분 사회가 엄격했음에도, 세종은 인재를 등용하는 데 있어 신분의 제약을 과감히 넘었습니다. 그의 결단으로 장영실은 혼천의, 자격루 등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세종은 학문적 깊이와 행정적 능력을 겸비한 허조와 황희를 각각 다른 방식으로 중용했습니다. 허조는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꼬장꼬장한 인물로 '송골매 재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원칙주의자였던 그를 원칙과 올곧음이 필요한 법제 정비와 행정 체계 구축에 활용했습니다. 그의 날 선 직언에도 늘 경청했고 자신과 의견이 다를 때에는 설득을 통해 허조와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반면 황희는 '검은소와 누런 소' 일화에서 보듯 유연한 태도를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세종은 황희가 양녕대군을 지지하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그의 성격을 아껴 영의정이라는 중책을 18년 동안이나 맡깁니다. 특히 당시의 영의정은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조정과 임금을 중재하고 그들의 의견을 적절히 조율하는 자리였습니다. 세종이 황희를 영의정으로 중용한 것도 조정과 임금을 중재할 적임자가 바로 황희였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은 이미 뛰어난 인재를 발탁하는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장기적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인재양성의 일환으로 그는 학문을 연구하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는 엘리트 집단을 만들기 위해 집현전을 체계적으로 운영했습니다.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은 집현전을 통해 성장한 대표적 인재들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그는 경연(經筵)을 활성화하고, 젊은 관료들과 학자들에게 지속적으로 교육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이는 조선 초기 사대부 관료들이 높은 수준의 학문적 소양을 유지하고, 이를 국정 운영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인재를 아끼는 것만큼이나 필요할 때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결단력을 보이곤 했습니다.
황희가 개인적으로 저지른 비리와 사건 조작을 통해 죽을 죄에 처했었고 조말생 또한 어마어마한 뇌물을 받아 죽을 죄를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변방의 뛰어난 장수였던 이순몽 또한 늘 사고를 쳐서 조정에서 탄핵이 벌어지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때마다 임금의 권위로 이들을 비호합니다. 황희와 조말생 등은 자신들에 대한 여론을 의식해 늘 사직을 청하였지만 세종은 그때마다 거절하고 중임을 맡깁니다.
이렇게 되니 능력이 출중한 이들이 세종의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였음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이는 왕권을 공고히 하면서도 관료들에게 책임 의식을 심어주는 효과를 냈습니다.
세종의 인사관리는 이처럼 단순히 사람을 쓰고 버리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는 동시에, 필요한 경우 과감히 결단을 내리며 조선을 안정적으로 운영했습니다. 할아버지인 태조 이성계가 인재를 아끼고 수집하는 데에 열망이 있었고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은 철혈통치로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최측근과 인척까지도 숙청한데 비해 세종은 사람을 아끼되 충성하게 만들었습니다. 아주 노련한 인사통치입니다. 그의 이러한 리더십은 조선 초기의 발전을 넘어, 이후 수백 년간 조선이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의 사례는 오늘날 조직 관리에도 중요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리더는 인재를 아끼되, 때로는 결단력을 발휘할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단기적인 성과에 치우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조직을 이끌어갈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력해야 합니다.
단기적인 성과만을 추구하는 조직은 쉽게 한계에 부딪힙니다. 세종이 백년을 내다보며 인재를 키운 것처럼, 현대 조직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인재 육성 프로그램을 설계해야 합니다. 이는 조직의 지속 가능성과도 직결됩니다.
세종대왕은 단순히 학문과 문화를 꽃피운 성군이 아닙니다. 그는 사람을 아끼고 키우며, 필요할 때는 과감히 결단을 내리는 한편 그들이 스스로 충성하게 만드는 균형 잡힌 리더십을 통해 조선을 진정한 황금기로 이끌었습니다. 그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현대 조직에서도 세종의 리더십을 벤치마킹하며, 공정과 배려, 그리고 결단력을 기반으로 한 HR 전략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