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후 1년이 지나도록, 나와 새로운 상무님과의 관계는 소원했다. 깊은 대화는 바라지도 않지만, 업무 외 사적인 대화나 개인적인 그분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 같다. 내가 어느 정도 상무님의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팀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에 대한 설명도 없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어느 날, 전 직장에서 같이 일 했었던 김이사님과 저녁을 같이 먹을 기회가 있었다. 김이사님은 새로 다니고 있는 회사는 어떤지, 어려운 점은 없는지 물어보셨다.
"우리 회사 좋죠. 요즘 딱 한 가지 고민이 있는 것 빼곤..."
하고, 상무님과의 불편한 관계 및 답답함에 대해서 토로했다. 잠자코 듣고 계시던 이사님이 반문하신다.
"만숑님이 상무님한테 먼저 가서 얘기해 봤어요? 지금 나한테 얘기한 고민들이나 어려운 점들?"
"얘기해 보려고 했죠. 그런데 상무님 스타일이 어떤 얘기든 물어보면 항상 바쁘다고 하시고, 귀찮은 티 팍팍 내시니까, 먼저 다가가서 말씀드리기도 애매하더라고요. 그냥 이번에 눈 딱 한 번 감고, 커피 한 잔 사달라고 얘기해 볼까요?"
"음... 커피 한 잔 사달라고 하는 말은 너무 뭐랄까... 좀 형식적인 느낌이 강해서 별 효과는 없을 거 같고... 만숑님은 상사 입장에서 후배가 하는 말 중에 제일 뜨끔한 말이 뭔지 알아요?"
뜨끔한 말?
"소주 한 잔 사주세요"
"소주... 요? 전 맥주파인데, 맥주 사달라면 안 되나요?"
"맥주 사 주세요도 좀... 너무 캐주얼스럽다고 해야 하나? 이게 뭐냐면... 소주 사달라고 했을 때의 그 느낌이 있거든, 뭔지 느낌 안 와요?"
"아... 잘 모르겠는데, 설명 좀 더 해주세요"
"자 봐봐요. 어느 날 만숑님 직장 후배가 와서 만숑님한테 '선배님, 저 소주 한 잔만 사주세요'라고 한다면, 만숑님은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요?"
"음... 얘가 요즘 많이 힘든가? 무슨 얘기를 하려고 소주 먹고 싶다고 하지? 퇴사하려는 거 아냐? 뭐 그런 생각들?"
"그렇지, 바로 그 느낌! 또?"
"그렇게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평소에 얘를 잘 못 챙겨줬었나? 오죽하면 나한테 와서 소주 한 잔 사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에 좀 미안해지기도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먼저 와서 얘기해 주는 게 고맙기도 하고"
"그렇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소주 한 잔 사주세요'의 느낌이 바로 그거예요. 상사 입장에서는 후배가 그렇게 얘기해 주면 놀랍고, 미안하기도 하고, 고마운 마음도 들고 복합적인 생각이 든단 말이죠. 그렇게 대화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사님, 저는 상무님이랑 둘이 소주 마시면서까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만나서 하소연하라는 건가요?"
"개인적인 하소연이 아니라, 팀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이나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을 어필하고, 그것에 대한 상무님의 생각이나 요청드리고 싶은 일들을 얘기해야지. 기껏 만났는데, 팀장임은 만숑님 푸념이나 듣고 싶어 하겠어요? 내가 얘기하고자 하는 건, 어떻게 하면 상사와 진솔한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을 얘기하는 거예요. 만숑님 고민 상담하라고 하는 게 아니라"
"이사님, 그런 얘기면 그냥 커피 마시면서도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상무님이랑 단 둘이 술 먹자고 얘기하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그러니까 요즘 친구들이 상사와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겁니다. 만숑님이 이번에 나한테 먼저 연락해서 술 한잔 하자고 했잖아요? 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알아요? 아까 만숑님이 얘기한 것처럼, 아 내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그래도 먼저 연락해 주니 고맙네라는 생각이 먼저 들더라고요. 상사들 입장에서는 귀찮아서 안 챙기는 게 아니라, 미처 생각을 못해서 못 챙기는 경우도 많거든요. 그리고 상사들이 아무리 어려워 보여도, 외로운 사람들이야... 밑에 사람들한테 먼저 다가가기도 힘들어 요즘. 그런데 후배 한 명이 먼저 다가와서 소주 한 잔 사달라고 한다? 그럼 너무 미안하고 고맙지"
오케이... 알았어. 여기까지는 이해했어.
"그러면 반대로 제가 먼저 그렇게 제안했는데 상무님이 싫다고 하면 어떡해요? 아니면 이리저리 핑계를 댈 수도 있고"
"밑에 사람이 굳이 먼저 와서 소주 한잔 사달라고 하는데 거절하거나 피한다?"
이사님이, 술 한잔을 들이켜고, 잔을 내려놓으며 말씀하신다.
"그럼 바로 손절해야죠, 그런 상사들은 만숑님이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얼른 다른 팀 찾아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