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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소주 한 잔의 힘

by 만숑의 직장생활

이직한 지 1년. 김 상무와의 사이는 여전히 멀었다.


깊은 대화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사소한 사담조차 없었다. 내가 기대에 부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팀을 어디로 이끌 생각인지도 들은 적이 없다. 보고는 하는데, 대화는 없었다.

어느 날, 전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박 이사와 저녁을 먹게 됐다. 박 이사가 물었다.


“새 회사는 어때? 힘든 건 없고?”


“좋아요. 딱 하나만 빼면.”


그렇게 김 상무와의 거리감에 대해 털어놨다.


“그 얘기, 상무한테 해본 적 있어?”


“하려고 했죠. 근데 뭘 물어봐도 늘 바쁘다고만 하시고, 귀찮은 티를 너무 내세요. 그런 분한테 먼저 다가가서 얘기 꺼내는 게 좀... 애매하더라고요. 이번엔 그냥, 커피 한 잔 사달라고 해볼까요?”

박 이사가 웃었다.


“커피는 너무 형식적이야. 별 효과 없어.”


“그럼 뭐라고 하죠? 소주라도 사달라고 해볼까요?”


농담처럼 던졌는데, 박 이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바로 그거야. 소주 한 잔.”


“전 맥주파인데요.”


농담 반, 진담 반.

“맥주는 좀 캐주얼하잖아. 근데 ‘소주 한 잔 사주세요’라고 하면 느낌이 다르지.”

“그게 어떤 느낌이죠?”

“만약에 후배가 와서 ‘선배님, 저 소주 한 잔만 사주세요’라고 한다고 쳐봐. 무슨 생각 들어?”

“얘가 요즘 힘든가? 퇴사 고민하나? 그리고... 아, 내가 너무 못 챙겼나? 그런 생각도 들죠.”

“그거야. 놀라고,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게 ‘소주 한 잔’의 힘이야.”

“근데 그렇게 만나서 무슨 얘길 해야 해요? 그냥 하소연하라는 건가요?”

“하소연 말고. 팀을 더 잘하기 위해 네가 하고 싶은 일, 기여할 수 있는 부분, 그런 얘기. 그리고 그에 대한 상무의 생각. 그걸 들으라는 거야. 괜히 불만만 늘어놓지 말고.”

“그런 얘기라면 굳이 소주 아니어도, 커피 마시면서도 할 수 있지 않나요?”

“그러니까 요즘 사람들이 상사와 거리 좁히는 걸 어려워하는 거야. 예를 들어, 네가 오늘 나한테 먼저 연락해서 술 한 잔 하자고 했잖아. 무슨 생각 들었는지 알아? 아, 내가 먼저 챙겼어야 했는데. 그래도 먼저 와줘서 고맙다. 이런 생각.”

잠시 잔을 비우던 박 이사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요즘 상사들 다 어려워 보여도, 외로운 사람들이야.
밑에 사람한테 먼저 다가가는 거, 다들 조심스러워해.
그런데 어느 날, 후배 하나가 와서 ‘소주 한 잔 사주세요’라고 한다? 그럼 놀랍고, 미안하고, 고마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근데요, 그렇게 용기 내서 말했는데도 상무가 피하거나 거절하면요?”

박 이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손절이야. 그런 상사한텐 굳이 노력할 필요 없어.
얼른 다른 팀 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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