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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Nov 16. 2019

<나는 간첩이 아니다> 치유를 위한 사진전, 고맙습니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치유하면서 세상을 따뜻한 앵글로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고 견뎌내고 기록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로 들어서는 순간, 울음 소리가 들렸습니다. 김순자 선생님이 누군가 꼭 안고 위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연신 고맙다며 우셨습니다. 미안하다고도 했습니다. 조작된 간첩사건에 휘말려 온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분인데 대체 무엇이 고맙고 미안할까. 저야말로 괜히 미안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어요. (영상으로 찍어서 캡쳐)


그런데 복도가 그제야 눈에 들어오더군요. 사진전이 열린 민주인권기념관은 박종철 열사를 비롯해 수많은 이들이 희생당한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 고문이 그리 큰 건물에 그리 많은 방을 갖추고 이뤄졌는지 아득했습니다. 사진전인데.. 넓은 공간에서 한 눈에 들어오는 전시회가 아니라, 방마다 삶을 기록한 사진을 걸었습니다. 정말 방이 많았어요.. 화재대피도에서 눈을 떼지 못했어요.  상상해봐요. 방마다 고문 앞에 무방비로 존엄성이 훼손되고 짐승처럼 고통받는 이들이 방마다 있었다고, 그 중 한 방에서 외롭게 숨진 이가 고 박종철 열사 뿐이었을지, 그것도 모르겠어요. (법률가들 책에 보면, 경찰이 시민을 고문해서 죽인뒤 시체를 한강에 버리고 무마하려했던 해방 이후의 사연이 나옵니다)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건물이 민주인권기념관이 되어 몹시 벅찬 동시에.. 생각보다 건물이 너무 높고 거대해서 놀랐어요.. 바로 저 건물. (페친 이근춘님 댓글로 새삼 알게됐지만.. 5층만 창이 작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지도, 소리지르지도, 몸을 던지지도 못하도록.. 그나마 층마다 저렇지 않았다는게 한편 안도하고, 한편 다른 방에서들 다들 뭘 한건지..) 


김선생님에게 가까이 가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발을 떼자마자 박종철 열사의 그 방이 나옵니다. 보존되어 있더군요. 4층의 박종철 열사 기념 전시실을 먼저 보고 올라온 터였습니다. 청년의 다정한 편지에 어찌할바 모르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죄송하다는 말 밖에는 별로 할 말이 없군요.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여기서 생활하는 동안 충분히 반성을 하고 나가서 아버지 어머니께서 항상 바라시던 저의 모습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별로 좋지 못한 소식을 전해야 겠읍니다. 아마 기소가 된것 같습니다. 제가 반성을 깊이하고 반성문을 두번씩 써 낸 것과는 무관하게 구류 전적 때문에 같이 들어온 네 명이 모두 다 기소가 됐답니다. 죄송합니다...


(1983년 재수 당시 편지)

그간 집안에 별고 없는지요?

저는 몸 건강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저께 서울에는 봄눈이 왔읍니다.

봄눈! 정말 생소한 단어지요! 저도 마찬가집니다.

한겨울에도 눈 구경을 할까말깐데 봄에도 눈구경을 다하고

물론 부산에는 봄비가 왔었겠지요.

지난번에 한번 비가 와서 우산은 샀읍니다.

지난 5일에는 겨우 물어물어 찾아가지고 형을 만났읍니다.

무척이나 반갑더군요. 내가 뱃지를 달고 만났으면

더 신이 났을텐데

와중에 눈길 가는 역사. 언론통폐합, 단어로만 알았던 내용을 표까지 정리한 보도로 만나니...

그리고 전두환씨는2525명이 투표해 2524명 찬성으로 대통령 됐다고.. 홍보할 일인건지...


사진전은 "국가 기관의 고문과 폭력으로 씻을 수 없는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사진을 통해 고통스러운 자신의 기억과 대면하고 내재화된 고통과 현실의 일상 속에서 자기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출발합니다. "고통의 기억과 대면하면서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고" 있는 사진입니다. "자기를 억제하고 침탈했던 기억의 공간들과 마주하면서 그리고 삶을 꽃피우고 꿈을 품었던 원존재인 자기자신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삶의 가치에 의미를 부여하고 스스로 치유하고 살피는 시간들"..


그냥 꼭 와서 보세요. 내일까지 전시인데, 보시면 좋겠어요. 아니면, 이분들의 삶과 사진을 기억하고 언제 어디선가 마주할 때 차분히 봐주시면 좋겠어요. 더 외롭지 않도록. 그리고 끝내 스스로 치유하면서 세상을 담담하게 앵글을 통해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고통의 기억을 마주하고 견뎌내고 기록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어릴 때 많이 보던 풍경. 그냥 아하! 하는 생각이 들어 한 장 찍어봤어요 제법 멋있게 나왔나요? 하하하. 내가 찍었지만 이 사진은 참 맘에 들어요. 아주 잘 찍은 것 같아."

"교도소에 갇혀 어둠 속에서 긴 세월을 보내지 않았다면 남 부럽지 않게 세상 구경을 했을 그"가 뒤늦게 멋진 풍경 앞에서 뒤늦게 셔터를 누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사실 미안한건 우리죠. 우리가 미안하죠..


"저녁에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내게 늘 평온한 마음을 가져다 줘요."

고통으로 죽고 싶었던 시간, 억울하게 빼앗긴 삶이 분해서 못견딜 것 같은 분이 저녁 바다 앞에서 평온을 찾고 사진을 찍는 모습도 상상만으로 가슴이 저려옵니다 "사진은 이 순간 멋진 풍경을 담는 것이 아닌 그 풍경에 빠진 자신의 감성을 걷어 올리는 행위"라고 하는데 모쪼록 순간순간 행복하셨기를.


"우리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어요! 어떻게 가족이랑 친척들 모두를 간첩으로 몰 수 있어요? 왜 잡아다 가두고 아버지도 죽이고 그랬냐구요. 이게 인생이란 걸 미리 안다면 사람이 태어나고 싶을까요? 내 어린 새끼들 그 피붙이들 놔두고 붙잡혀와서 내가 속이 다 탔어요. 간첩은 무슨 간첩이예요. 우리가!"


"구석구석 다니면서 다 찍어봤어요. 우리 아버지가 외롭게 숨을 거둔 곳이잖아요. 이제라도 가서 살펴드리고 싶었어요. 또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간 곳이잖아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은 곳이고요. 그래서 내가 들쑤시고 싶었어요. 자꾸 가서 보니까 더 세밀하게 보게 되더라고요. 내 맘껏 보니까 뭔가 속이 풀리는게 있어요."


맨날 고문받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천장. 파이프를 뜯으면 물이 콸콸 나오는데 그걸로 물고문하겠다고 말한 그 천장을 다시 바라보고. 지옥의 공간으로 선명하게 각인된 계단의 기억.. 이분들은 사진에 담았습니다.


가족 일부가 사형당하는 와중에 모진 고문에도 살아남았으나, 그 삶이 어떤 것인지 짐작되지 않습니다. 기력이 떨어진 노년에 열심히 사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역시 여쭤볼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 작업을 찬찬히 오래 해온 치유사진가 임종진님에게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고 김태룡 선생님의 삶. 1968년 고등학생 시절 삼척의 집으로 월북했던 외가 친척이 부상을 입은채 찾아왔고. 부친은 가족의 정을 내치지 못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11년 만인 1979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습니다. 지독한 고문을 받으며 40여일이 흐르는 사이 아버지는 사형, 어머니는 5년, 누나 김순자와 남동생은 7년, 본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죠. 모진 세월 끝에 2010년에야 재심 신청을 했고. 2016년 최종 무죄를 확정받습니다. 2018년 돌아가실 때 까지 2년 여 부디 한을 달래셨기를. 조금이라도 위로받으셨기를. 이런 사연들을 잘 모르고 사는 무심한 한 사람으로서 뒤늦게 죄송합니다.



끝내 진실은 밝혀졌고. 간첩이 아니라 무죄로 판결받았습니다. 그런 분들이 많아도 너무 많습니다. 저들을 고문하고 진실을 왜곡한 경찰 수사관, 그대로 무시무시한 간첩으로 기소한 검사, 죄없는 이의 변론을 귀담아 듣지 않은 판사. 저는 그들의 이름도 밝히고 남겼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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