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이야기, 뜨겁고 열렬할게 분명하고, 때로 지리멸렬하고, 분노하고 한숨짓겠지만 분명 아름다울 여자들의 이야기를 언급하는 한 페이스북 포스팅을 보고...
문득 이 책을 찾았습니다. 19년 8월 저자 사인 받을 때, 단정한데 유혹적인 글씨체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어렴풋 지나갔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사랑은 눈부시게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사랑 에세이라니..제 취향의 책이 아니라 판단했죠^^;; 속이 비치는 트레이싱지(?)로 한겹 더 싸고, 살랑거리는 꽃잎이 겹치는 책 표지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역시 제겐 높은 난이도. 그래서 책장 구석에 두고 한번도 펼쳐보지 않았던... 쏘리. 미안해요ㅎㅎ
머리 복잡하고, 삐꺽거리며 윤기를 잃은 제 상태에 나쁘지 않을거 같았고요. 전날 읽다 만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 그리고 동시에 읽고 있는 <자본주의의 미래> 같은 책을 펼치기 전에 토요일 오전 햇살을 즐기기에 좋을 거 같아서.. 충동 독서.
작가의 이야기는 여고시절 '처녀성'을 잃어버린 이전 세대 어느 여자의 삶에서 출발합니다. 처녀성. 이 단어가 이렇게 낡고 진부해질지 짐작못하던 시절의 이야기. 여자들의 삶을 순식간에 망가뜨리기는 공포이자, 지키면 타인의 칭찬이라도 받는줄 알았던, 그러나 그래봐야 한 남자에게 종속되는 개념에 불과했을텐데... 사회적 의식이란 얼마나 강력하고, 또 쉽게 사그러드는 건가요.
"성교육은, 여성의 성을 위축시키고 삶을 제한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여성의 몸은 임신과 출산의 도구이기에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타인과 사회의 수단으로 소외시키도록 만들었다.." (152쪽)
여자가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 우리 세대의 시간이 아닌가 싶고, 작가는 그 앞줄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지독한 고통을 버텨내고 자유를 쟁취한 작가님에게 일단 존경과 위로를.. 그리고 본격 사랑 이야기.
"남자에게 제2의 여자로 남는 편이 더 좋아. 당연하고 편안한 여자가 되는 느낌이 싫거든".. 작가가 20대에 프랑스에서 만난 친구의 말. "생경에서 어지러웠다"는 소감에 완전 동의. 뭐라고오오? "그녀의 삶이 자유롭고 흥미진진했어도 나의 지지부진한 삶을 비웃을 자격은 없었다"는 작가의 표현에도 눈길이 가면서.. 그러나 한참 뒤 작가는 이렇게 털어놓습니다.
"나는 남편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존재로, 지루한 일상처럼 항상 거기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앞에 다시 매혹적인 여자로 등장할 가능성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115쪽)
누군가에게 편안한 존재가 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당연한 존재가 되는 것도 관계의 밀도에 따라 기꺼이. 그런데 지루한 존재와 한 끝 차이일 수도 있겠군요...
"...서로를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믿고 살았지만, 운명 이후의 일상은 알지 못했다. 너무 일찍 안심했고 서로의 존재가 당연해졌다. 함께하기까지 기울인 노력은 뜨겁고 열렬했지만, 안정이 찾아오자 급속도로 나태해졌다. 서로 알고 이해하고 관계의 성질을 협상하기까지 필요한 시기를 제대로 보내지 않고, 너무 일찍 서로를 묶어버리고.. 그러면서 성숙한 사랑으로 향하는 진입로를 잃어버렸다." (116쪽)
사랑이라 부르든, 우정 혹은 다른 단어로 묶든, 사람의 관계는 서로 성장하고 힘이 되는 존재일 때 지속가능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성과 동성, 위아래를 떠나 관계의 본질이 그렇지 않을까요.. 이거 참 어려워요. 기본적으로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는게 우선이라 생각합니다..
"사랑은 상대의 질서를 인정하고 끊임없이 재발견하고 감탄하고 그럼에도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관계를 재탄생시키지 않고는 유지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이 삶 속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창조적인 활동이라면 그건 끊임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서로 다른 존재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게으른 자에게 태어나지 않는다. 상상력이 부족한 자에게도." (132쪽)
편안하거나 당연한게 아니라, 뭔가 계속 움직이는 힘. 사랑하는자와 사랑받는자의 관계는 혁명적인 힘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는게 없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 나를 찾는 과정이기도 하고, '사랑하는 과정이 사랑'이라 했던 플라톤 <향연>의 해설을 떠올려봅니다. 뭐 플라토닉 러브가 아니더라도ㅎㅎ 노오력이 필요하고, 상상력도 필요하고..
완독하진 못했어요... 그러나 문득 펼쳐보고,생각의 여지를 남겨준 책. 이서희 작가님, 이야기를 계속 풀어가주시길. 팬데믹으로 여성의 일터에서 쫓겨나고, 여성의 지위가 다시 후퇴할거란 경고가 들리는 시대에 주체적 여성의 구체적 사랑 이야기에 마음 보탭니다. 사랑의 감각을 지루하지 않게 탐색하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서로 귀여워하는 관계는 막강하다. 존재를 향한 너그러움과 연민이 함께할 때 우리는 잠시나마 안전과 자유를 동시에 느낀다... 서로를 귀여워하는 순간은 끝없이 지속되지 않는다.. 귀여워하기는 실천이다. 우리가 배우고 실습하고 익혀야 할 행위이자 상태다. 치유처럼 말이다." (2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