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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Mar 07. 2021

<한명><여기, 사람의 말이 있다>여성잔혹사 기억하자


그들은 석순 언니를 땅에 묻지 않고 변소에 버렸다.
그들은 죽은 소녀에게는 땅도 아깝고, 흙도 아깝다 했다.
21쪽 굵은 글씨는 각주 16번. 정옥순, 1920년생 북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슬픈 귀향 1부- 북녘 할머니의 증언]에서 인용했다고 합니다.

아침이 되어 그녀가 뒷마당 세면실로 갔을 때 소녀들이 저마다 울면서 피 빨래를 하고 있었다. 각주 63, 김복동, 1927년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2]
소녀들은 서로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녀는 아래가 부어 다리를 제대로 오므릴 수 없었다. 송충이에 쏘인 것처럼 따갑고 오줌이 찔끔찔끔 나왔다... 첫날 모두 몇 명이 다녀갔는지 그녀는 모르겠다. 각주 66, 김춘희, 1923년생,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2]
군인들은 열세 살이던 그녀를 밤새 공기놀이하듯 가지고 놀았다. 각주 67, 조윤옥 1925년생. [가고 싶은 고향을 내 발로 걸어 못 가고]

이것은 소설입니다. 그런데 316개의 각주가 촘촘하게 달려 있습니다. 실제 '위안부' 피해자의 육성을 담아낸 소설입니다. 피해자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역사이지만, 그 고통을 이렇게 풀어내니 또 다릅니다. 놀랍도록 아픈 고백입니다. 그 고통이 너무 구체적이고 끔찍해서 아연하게 됩니다.

그분들의 삶은 지워졌고,
누구누구가 살아서 돌아왔는지 궁금하면서도, 보고 싶어 죽겠어서 군자의 고향집까지 찾아갔으면서, 그녀는 혹시나 우연히 소녀들을 만날까봐 겁이 났다. 그래서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길을 가다가도 누가 자신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 같으면 얼른 골목으로 숨어버렸다. (101쪽)

그분들 스스로 그 지옥이 무엇인지 분명히 몰랐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들을 납치하거나 속인 이들이 한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은 제대로 손에 쥐지 못한 군표와 지폐가 있다고 해서, 많은 증언들을 토대로 한 지옥의 기록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그 증언에 나서는 용기는 쉬웠겠습니까. 책의 주인공처럼 숨어서 지워진 분이 더 많았겠죠.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곳이 위안소라는 것을 몰랐다. 일본 군인을 받는 곳으로만 알았다.. 위안소니, 위안부니 하는 말을 그녀는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다. 그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곳을 그저 창녀굴 같은 곳으로 알았다. 그곳이 위안소였다는 걸, 그리고 자신이 위안부 피해자라는 걸 아무도 그녀에게 일러주지 않았다. 군인을 하하는 손님이라고도 했다... 만주 위안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소년들은 그런 곳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121쪽)

나도 피해자요.
그리고 또 뭐라고 써야 하나? 막막해하던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각주 233, 이옥선, 1925년생, CNN 인터뷰, 2015년 12월29일 방송)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한 시간 전에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70년도 더 전 일은 기억이 난다. 위안소 방 천장에 매달린 알전구가 깜박깜박하던 것까지.
신빙성이 없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다. 위안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알리고 다니는 이들을 향해서, 몇 살 때 끌려갔는지, 누구한테 끌려갔는지, 어디로 끌려갔는지 분명히 대지를 못하니까, 고향 지명조차 제대로 모르는데다, 학교에 다니지를 못해 자기 이름 석 자도 쓸 줄 모르던 소녀들이 대부분이었다는 걸 고려도 않고, 수십 년이 흘러 기억들이 토막 나고 뒤죽박죽 뒤섞여버렸다는 걸 모르고 (150쪽)

넷플릭스 시리즈로도 만들어진 <믿을 수 없는 강간 이야기>피해자 두 번 죽이지마  보면, 압도적 공포가 지배하는 몇 초사이 성폭력의 트라우마가 두뇌에 소상을 입히고, 우리 정신은 스스로의 경험에 대해 불확실한 목격자가 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너 강간당한거 맞아? 라고 꼬치꼬치 캐묻는 과정에서 순서가 틀리기도 한다면 위증자인가요? 피해자다움을 요구받는 건 여전한데, 이게 수십 년 전 묻어버린 과거라면요?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2차 가해가 수도 없이 이뤄졌겠구나, 아찔해집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이 책은 [독서가와 행동가들] 뭐 읽고 있니? 클하 살롱에서 추천받았는데, 마침 램지어 교수 사건 덕분에 펼쳤고, 램지어 ㄱㅅㄲ를 외치며 역사를 덮으려는, 아니 뒤집으려는 무도함에 분노했습니다. 소설보다 더 끔찍할게 분명한 그 기억들에 사죄는 커녕..
램지어 관련 링크도 참고삼아 넣어둡니다.
김수형 SBS 워싱턴특파원 페북 글들은 독보적인데, 일단 잘 정리한 피렌체의 식탁 기고문 [김수형 칼럼] 미국은 하버드 교수의 ‘위안부 역사왜곡 폭동’을 어떻게 제압했나  일본의 조직적 대응에 문제를 제기한 박성호 MBC 워싱턴 특파원 글도 참고.


소설을 소설로 읽지 못하는건 역사의 무게가 너무 무겁고,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죠. 소설 자체로도 깊게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작품이오니 추천합니다.... 그리고. 이 주제를 좀 더 깊고 넓게 보는 것을 권합니다... 완전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당초 변희수님 때문에 책을 펼쳤어요. 배제와 억압, 전쟁과 빈곤의 세계에서 낸 '목소리'들을 정리한 책이라..평화와 민주주의, 더 나은 세상, 지구를 위한 '말' 중에서도 '나는 마이너리티'라는 2부가 궁금했습니다. 성소수자 얘기는 없었는데.. 여성에 대한 잔인한 역사는 무섭게 다가옵니다. 책은 나디아 무라드, 2018년 노벨평화상을 받은 여성의 말을 풀어냅니다. 이라크 북부 소수집단 야지디인 그는 21세이던 2014년 ISIS에게 납치되어 성노예 '사비야'가 됐습니다. 이교도인 노예를 강간하는 건 죄가 아니라는 ISIS. 석달 만에 탈출해 세상에 그 참상에 대해 말하고 또 말한 그녀 덕분에 이 문제가 재조명됐죠.


여성을 유린하는 것은 한 공동체 혹은 민족의 현재와 미래를 파괴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 1949년 유엔에서 전시 성폭력을 금지한 제네바협약 채택된 뒤에도, 동티모르와 서파푸아 분리독립에 맞서 인도네시아 군은 수십년 동안 30만~40만 명을 살해했으며 여성 수천 명을 성폭행했습니다. 1971년 방글라데시 해방전쟁 당시 파키스탄군도, 1980년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소련군도, 1990년대 코소보 내전과 보스니아 전쟁도 잔혹했습니다. 알바니아와 보스니아 여성 중 세르비아 민병대와 군경의 '조직적 강간' 피해자가 2만~5만명. 1994~95년 내전이 벌어진 동아프리카 르완다에서는 여성 25만~50만 명이 성폭행 당했습니다. 또 위키피디아 '전시 성폭력' 항목에는 한국군과 미군이 베트남전쟁 당시 여성들을 성폭행한 것도 그런 범죄의 하나로 설명하고 있답니다. 일본 사회가 위안부 문제가 일본 내에서 본격 제기된 1990년대에 펄쩍 뛰며 일본 언론인까지 협박하고 린치를 가했듯, 우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전 당시 성폭력 의혹을 인정하라는 영국 의원의 목소리도 나왔던데, 몇 년 전 유사한 목소리의 배후에 일본이 있다고들 했지만..그게 설혹 일본의 물타기(?)라도 할지라도, 인정하고 사죄할 일이 있다면 해야죠.. 역사는 이 문제에서 인간이 얼마나 많은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야만성은 여성들에게 특히 가혹합니다.
페미사이드 통계를 모으는 여성 단체 '만남의 집'에 따르면 2008~2018년 사이 32시간 마다 1명 꼴로 여성이 살해됐다. (101쪽)


뭐, 여성 만의 문제는 아니죠. 이 책에는 골고루 사연이 등장하는데...인간은 꽤 잔인해서, 다른 종족을 멸종시키는 걸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5만 년 전부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살아온 원주민(애버리니지)들은 유럽인들의 이주 이후 1900년 무렵 인구의 90%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남미와 비슷한거죠.. 그 중에 태즈메이아인은 아예 사라졌고요. 1938년 원주민 활동가 잭 패튼은 "백인 남성들은 애버리지니를 개선될 전망이 없는 비천한 사람처럼 봅니다..우리는 이리저리 몰리는 소 떼처럼 다뤄지고 싶지도, 특별한 계층으로 다뤄지고 싶지도 않습니다"라고 시민권을 요구합니다. 그의 다섯 딸을 비롯해, 원주민 아이들을 인종 개량 차원에서 부모에서 빼앗아 강제노역과 입양 등으로 보낸게 1970년대까지 이어졌고, 2008년에야 호주 정부가 공식 사과한 것은 또다른 역사. 소수자 얘기, 말컴 엑스 목소리 보다가.. 오바마의 대선 출마 당시 임기6년 연방 상원의원 100명 중 흑인이 오바마 뿐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확인합니다..


넘 암울한 얘기인가요? 수십만 여성이 희생된 르완다는 2003년 국회의원과 장관 30%를 여성에게 의무할당하는 헌법을 만들었고, 성폭행은 전쟁범죄로 단호하게 엄벌했습니다. 세계경제포럼 성격차 보고서에서 르완다는 2020년 평등 수준 9위. 한국은 145개국 중 108위입니다. 저는 희망을 고집하는 사람이라.. 끔찍한 과거를 오래 기억하고, 사죄하며,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한 의지에 기대고 싶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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