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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Nov 08. 2022

<소뿔농장> 슬픔은 단단한 거름이 되고, 마음이 자란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좋다”

이날 최고 어르신 말씀에 갑자기 귀가 쫑긋했다. 딸 부부, 손주와 함께 오면서 모두 나눌 만큼 넉넉히 열무김치를 해오신 어르신. 지나간 세월에 눈부신 순간들이 여럿일텐데 지금이 리즈 시절이라고? 나는 할머니가 되어 “지금이 최고”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 갸웃 하다가 바로 정신을 차렸다. 바보 같으니라고. 지금이 아찔하게 고마웠다. 살아있어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란걸 우리 이제 다 알지 않나? 노랗게 빛나는 은행나무를, 지금 내가 보고 있다는게 문득 고맙고 미안한 시절 아니던가? 그 어르신은 삶이 그런 순간들로 이어진다는 걸 아셨다. 낯설 수 있는 자리에서도 가족과 안녕한 지금을 기꺼이 즐기셨다. 모두 진심으로 환대하는 모임이란 걸 들으셨겠지만, 그런건 본능적으로 알아차리게 마련이다.


생명의 기운에 귀 기울이며 농사 짓는 소뿔농장. 농장 꾸러미 친구들이 모인 날이었다. 코로나 탓에 3년 만에 모인게 봄이었는데, 또 모였다. 봄날 산책 이야기는 여기.


가을 모임을 앞두고 서규섭 농부님은 사흘 전부터 무쇠 가마솥의 녹을 닦고 들기름 발라 장작에 달구고 다시 씻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단다. 작은 무쇠팬 시즈닝도 힘든데 그걸 가마솥 사이즈로..

밭에서 거둔 배추와 두부를 넣은 된장국은 가마솥의 시간이 더해져 깊고 진했다. 슬픔과 회한, 때로 분노와 막막함까지 뒤섞여 애도의 시간을 보내는 우리에겐 이런 위로가 필요했나보다. 농장 마당에서 오래 끓인 된장국에 마음이 녹았다.


서로 손발을 맞춰 척척 전을 부치고, 불멍 모닥불에 장작을 챙기고, 저마다 분주한 모습이 어우러졌다. 농장 곳곳에서 지들끼리 신난 아이들도, 나란히 마당에 앉아 설거지를 하는 남자들의 뒷모습도 스산하던 계절의 풍경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두 분 뒷모습을 담은 사진가 종진님의 시선이 다정하다.


아침 8시에 집을 나서 양평 문호리 L님 모시고 자연리 농장에 10시쯤 도착했다. 바지런한 이미아 농부님과 K님이 무와 당근, 호박과 버섯, 가지를 소쿠리마다 가득 손질해놓았다. 나는 뭐든 척척 해내는 L님 보조란게 흐뭇했다. 휘뚜루 마뚜루 무생채와 콩나물을 무치고, 미아 농부님이 직접 쑤셨다는 올갱이묵을 배추와 오이, 김까지 더해 액젓과 참기름으로 간했다. L님은 “생채 넘 맛있게 잘 무쳤다, 근데 쪼끔 간 더해도 괜찮겠다”라든지, “배추도 좋지만 내가 좋아하는 오이를 더해주면 안되냐“라든지, 칭찬 듬뿍하며 살짝 팁을 주는 방식으로 주방의 리더십을 발휘하셨다. 고래를 움직인다는 칭찬을 능수능란하고 적절하게 쓰는 모범사례.

이 농부님에게 오늘 배운 신메뉴는 프라이드그린토마토. (우리 왜 다 그 영화 아는건데ㅎㅎ) 연두색 토마토를 얇게 썰어 부침가루 반죽에 굴려 부쳤다. 지글지글 상큼한 맛에 감탄! 날이 추워지면 토마토가 빨갛게 익지 않고 저리 초록초록 하다는데, 현명한 요리다. 음.. 마트에 팔지 않는 저 초록 토마토를 어찌 구할까나.


성장촉진제를 쓰지 않은 소뿔농장 오이는 작고 휘어졌다. 근데 맛이 다르다. 맨날 사먹던 그 맛이 아니다. 옛날 맛이라는데 시골서 자라지 않은 나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다르긴 다르다. 게다가 호박이 이렇게 달큰한 채소였나. 새우젓 약간 넣고 L님이 볶았는데 살살 녹는다. 말린 가지는 불려서 파마늘 액젓과 맛간장에 볶았더니 고소한 뒷맛이 쌉싸름하다. L님과 눈빛 교환하고 설탕으로 맛을 잡았다. 땅에서 갓 거둔 채소들, 특히 소뿔 채소들이 향기 진하고 더 맛있는건 이유가 있다.


미아님의 배추찜도 녹는다 녹아..이날 양평 베이커리 디저트들도.. 쓰러짐. 최고네 최고야…..

품종 개량한 글로벌 회사 종자의 식물들은 불임이다. 수확 때 씨앗을 남겨 뿌려도 싹이 트지 않기 때문에 해마다 새 씨앗을 사야한단다. 대를 잇지 못하게 만든 씨앗이라니. 종자회사 비즈니스는 생명에 반하는게 특징이구나. 비닐하우스에는 꽃과 나비가 없어 수정을 돕는 호르몬제를 쓴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이와 달리 뭐든 자연 그대로 살리고 거두는 소뿔농장 농부님들의 자부심, 인정한다. 존경한다. 고맙다. 번듯하고 예쁘게 소비자 취향대로 사이즈 맞춰 성장촉진제 성장억제제를 쓴 채소들이 밍밍하다는 걸, 소뿔 채소를 먹어보고야 알았다. 착하고 올곧은 농업, 걱정 없이 계속해주십사, 우리는 연회비를 내고 1년에 8개월 매달 꾸러미를 받는다. 수확이 없는 한겨울에도 농부님들이 쉬는게 아니니, 1년 단위로 값을 드리는게 맞다는 걸 이제 안다. 수해가 나면 같이 염려하면서 꾸러미 덜 채우셔도 된다고 응원하고, 닭이 놀라서 알을 낳지 못하면 그 다음달에 보내주셔도 된다며 기다린다. 매달 꾸러미와 함께 오는 농장 소식 덕분에 이런 공감이 가능하다. 농장과 직접 연결되면 마트에서 별 생각 없이 사먹는 소비자도 같이 자란다. 해외 선진농업 견학도 다녀오신 미아 농부님 눈에도 이런 농장은 특별하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보니 우리도 덩달아 특별해진다.


매달 살뜰하게 꾸러미 보내주시는 미아 농부님이 조용히 따로 챙기는 작물이 있었다는 건 뒤늦게 알았다. 농장 꾸러미 회원 중 독한 치료를 거쳐 치유 과정에 있는 이들이 있다. 그런 분에게 특히 좋다는 말을 듣고서 녹두를 따로 키우기 시작했단다. 정성을 다한 녹두에 온 마음이 실렸다는걸 모두 알겠다. 활짝 웃는 건강한 미소들에 이런 응원이 보태졌구나.

건강했던 과거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더이상 불안해하지 않을 거라고 Y님은 말했다. 이제는 온 가족이 꾸러미 도착에 반색하는 C님 댁은 녹두잡곡밥으로 드셨다는데, Y님은 녹두에 담긴 정성이 너무 고마워서, 아직 먹지 못하고 있단다. 봄에 만났을 때보다 두 분 얼굴이 맑다. 몸과 마음이 균형을 찾으면서 더 단단해진 이들은 아름답다.


서로 의지하고,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은 마음이 켜켜이 쌓인다. 사랑받는다는 감각과 괜찮은 인간이라는 자존감 다시 채운 걸로 따지면 나도 올해가 역대급인데, 1년에 한두번 볼까말까한 이 분들과 함께 하면 그 어느 때보다 촉촉해진다. 농부님들 명강을 거쳐 각자 근황을 빙자해 이런저런 마음을 털어놓았다. 10.29 참사 후 일주일, 모두 비슷한 고통을 마주한건 공감을 더 짙게 만들었다. 개별적 사연은 달라도 아픔을 이겨내는 과정이 닮았다는 걸 발견한다. 한 사람씩 눈 맞추며 다정한 질문을 던져준 정혜신 쌤은 새 숨을 불어넣는 수호천사다. 이 집단치유의 시간을 내가 간접적으로 건너 들었다면 어우, 뭐 그리 착한 사람들만 모였냐고 웃을 거 같다. 실제 믿기지 않는 시간이다. 선한 사람들이 각자 자신을 들여다보고 솔직한 느낌을 나누다니, 거짓말 같은 일이긴 하다. 그런데 혼자 품고 눌러두었을 감정들을 나누다보면, 괜히 든든하고, 뭐라도 하겠노라 단호해진다. 슬픔은 단단한 거름이 되고, 거칠었던 분노는 또렷하게 정제된다. 우리는 이것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는데, 가슴 아픈 일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데.. 마음이 자란다.


내친 김에 꿈 같은 상상을 이어가본다. 아이들이 서로 마음 챙기는 기쁨을 배우며 자란다면 어떤 어른이 될까? 타인에게 공명하는 사람으로 자란다면, 우리 모두 끝내 덜 상처받을까? 우리가 이렇게 시작한다면..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어떤 마음인지 궁금해하고, 물어보고, 들어보는 일들을, 다음 세대는 더 잘하지 않을까? 그렇게 서로 대화하다보면, 무도한 일을 참지 않고, 더 나은 미래에 진심인 친구들이 늘어나지 않을까? 피해자를 탓하는 대신 약자에 공감하는 사회란게 그리 어렵나? K님은 방긋방긋 웃으며 한 1년 휴직하고 교육개혁에 매달해볼까 고민이라 했다. 죄책감으로 가득한 아이들의 마음을 달래는 법을 고민한다고 했다. 부모의 기대, 사회적 요구에 미치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의 마음이 죄책감과 분노로 어지럽다는 것도 잘 몰랐네. 우리의 이야기는 한낮부터 저녁까지 건강하고 다정했다. 농장 나들이에 진심일 수 밖에 없네. #마냐산책 #별총총_달휘영청_소뿔농장


청년 J님이 그려준 L님과 K님ㅎ

나도 예쁜 날이다ㅎㅎ


아차차.. 저녁은 마음이 더 부자인 님들이 호쾌하게 쏘신 편육과 막국수 #봉춘막국수. 근처에 건물 몇으로 확장한 ㅎㅇ막국수 갔더니 이미 고기가 다 떨어졌다는 소식에 옆짚으로 갔다. 이른 저녁 귀갓길은 3시간 걸릴 것으로 예상됐는데 막국수 먹고 천천히 출발하니 1시간40분. 근교라고 하기엔, 피크타임엔 대전보다 오래 걸리다니, 대단한 주말 나들이객에 꼽싸리 낀 하루인데 다들 나처럼 안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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