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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냐 정혜승 Apr 14. 2023

<스페인 5일차>알함브라,수학적으로 시적으로 아름답다

여행기 쓰다보면 시간의 속도에 새삼 놀란다. 벌써 5일차


<스페인 1일차> 남편의 쓸모, 남편의 재발견을 위해

<스페인 2일차>몬세라트, 치유의 성모님부터 바르사까지

<스페인 3일차> 가우디는 외계인일거야 &보케리아 시장

<스페인 4일차> 바르셀로나에서 그라나다로


711년 유럽으로 진격한 무슬림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더이상 북진하지 못했다. 그 땅에서 왕조를 시작했으나 왕권 다툼으로 300년 만에 무너졌다. 지지부진한 세월 끝에 무함마드1세가 그라나다에서 나사리 왕조를 세운 건 13세기 초. 그는 78세에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운이 좋은 죽음이었다. 그의 후손들은 대부분 마흔 전에 독살과 암살 시리즈의 희생자가 됐다. 정실 부인을 4명까지 두는 무슬림 관습은 다수의 ‘적자’, 왕 후보들을 쏟아냈고 부모 형제를 죽여야 살았다. 250년 동안 20명을 갈아치운 왕좌는 피에 젖었다. 같은 기간 스페인 카스티야 왕조는 6명의 왕이 통치했다.


와중에 현명왕, 건축왕, 사자왕이 있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그들의 삶이고 나사리 왕조의 역사다. 눈이 녹지 않는 3000m 시에라네바다 산맥이 찬 바람을 막아줘 농사가 잘됐다. 카스티야에 조공을 바쳐도 중개무역으로 부강했고,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그라나다로 유입됐다. 붉은 궁전 알함브라는 완벽한 요새인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작품이다.


알함브라는 아름답다. 이슬람 예술과 건축을 제대로 본적 없다는게 슬플 지경이다. 정교하고 섬세한 장식은 아름다움을 집요하게 추구했다. 겉으로는 별 장식 없이 단정한데, 안쪽은 여느 서양 건축이 넘보지 못할 만큼 화려하다. 이슬람이 수학과 과학, 의학을 선도했다더니, 알함브라는 수학적이고 시적이다. 동양과 서양의 황금 비율이 절묘하게 어우러졌고, 구조 자체의 아우라가 완벽하다. 예쁜 문양인줄 알았는데 곳곳에 싯귀다. 왕의 오른팔인 재상은 행정 능력 뿐 아니라 시인이어야 했단다. 서사, 소통의 힘을 아는 이들이었다.

알함브라 궁전에는 이사벨 여왕의 손자 신성로마제국 카를5세의 거처와 궁전도 있다. 이슬람 스타일 완벽한 건축에 빠졌다가 초라한 면모에 당혹스럽다.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은 결혼 동맹의 위대한 업적을 위해 1492년 마지막 무슬림 왕조를 몰아냈다. 조공 받던 수백년 안정적 관계도 더 큰 정치적 이익 앞에 가차없이 버려졌다.

.나사리 왕조 마지막 왕 보합딜은 한살 된 아들을 인질로 카스티야에 보냈다. 왕조가 망할 때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열살 아들은 자신을 길러준 카스티야 이사벨 여왕에게 끝내 돌아가버렸다. 저 아름다운 궁전도 잃고, 가족도 잃은 왕은 모로코에서 외롭게 오래 살았다.

나라가 망하면 문화예술도 휘청인다. 알함브라는 승자의 서사에서 밀렸다. 수백년 버려지고 잊혀졌다. 유적을 되살린 건 19세기 미국 작가 워싱턴 어빙의 ’Tales of the Alhambra’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


권력을 위해 경쟁자를 살해하는 것은 중세 방식이다. 지금은 검찰의 칼이 정치적으로 살해한다. 목숨을 부지하니 문명이 진보한 셈이지만 권력을 더 견제하지 못하는 것은 시대적 한계다. 와중에 누군가는 예술을 하고, 인류를 위해 뭐라도 하고 있을게다. 조금 덜 잔인하게, 조금 더 다정하게, 조금 더 나아간다.

마이리얼트립 투어가 어긋나는 바람에 당황하다가 오디오 가이드를 신청했는데 꽤 훌륭. 스페인 공인가이드 안혜영쌤 덕에 많이 배웠다. 무튼 여행은 여행. 그라나다 대성당 인근 가게에서 토마토 뿌려준 토스트. 훌륭하다. 8:30 알함브라 입장권을 간신히 구입, 아침부터 서둘렀다. 걸어서 35분 거리라 만만했는데, 남산 정도의 가파른 길이란 건 몰랐다.

네시간 반 정도 여유 있게 즐겼다. 맘 같아선 더 있고 싶었는데 점심.. 알함브라 바로 앞 4.4 평점 식당​을 찾았는데 이 집 평점은 양인 것 같다는게 남편 평. 1인분이 암만봐도 2~3인분. 네 조각 나온 소꼬리찜도, 내 손바닥 둘 합친 크기의 황새치 구이도 끝내 남겼다.

맛은 있었지만 양에 눌렸다.


다시 걸어서.. 그러니까 아침부터 6시간 가까이 걷고 숙소로 돌아와 뻗었다. 바르셀로나 좁은 호텔에 비해 그라나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넘나 쾌적하고 아늑해 시에스타 즐길만 했다. 어차피 오후 일정은 알함브라 건너편 알바이신 지구 니콜라스 전망대에서 일몰까지 즐기는 것. 6시쯤 느긋하게 올라가 바글바글 사람들 틈에 앉아있다가 아예 그 앞 식당​으로 옮겼다. 나는 탄산수, 남편은 맥주와 와인 먹으며 노닥노닥. 옮길까 하다가 저녁까지 주문했다. 나름 알함브라 뷰 식당이 어디 흔한가. 스페인 샌드위치 보카디요도 무척 훌륭했고, 남편 추천으로 Nicolas de Angelis, 박규희 빅주원의 #알함브라_궁전의_추억 함께 들었다. 이것도 나름 도란도란 연장선이다.


그는 음악 얘기할 때 가장 행복해보인다. 비록 오늘도 내 사진에 안타까워 하면서 사진의 기술 잔소리를 이어갔지만 참을만 했다. 포스팅 사진 중 좋은 건 그의 것이다.

8시40분 일몰이라더니 9시쯤 보랏빛 노을.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그림자에도 반했다. 낮에는 달콤한 꽃내음, 시원한 나무 향에도 취해 반했거늘. 아침부터 밤까지 알함브라와 함께. 수백 년 전 나사리 왕조 사람들이나 즐기던 호사다.


그리고, 잊지 않는다. 내 노란리본은 서울 평소 가방에 두고 왔지만 남편은 배낭에 노란 뱃지 달고 왔다. 충전은 충전. 여행은 원래 돌아가기 위해 떠나는 것. #마냐여행 #스페인_5일차  #스페인_epi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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