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농장 꾸러미에 무슨 알이 많더라고요. 이상한, 처음 보는 것들 중에.. 라디오 PD인 ㅎㅁ님에게 물었더니, 그거 화분에 심는거라고 하더라고요.“
그 알은 녹두였다. ㅇㅇ님 고백에 다들 빵 터졌다. 똑똑한 ㅎㅁ님 허당 구석이 있었구나. 불려서 밥할 때 넣으면 고소한 녹두. 근데 녹두도 흙에 심으면 싹 안트나?
11월 첫 토요일, 별총총 달휘영청 소뿔농장 채소 꾸러미를 받는 회원들의 가을 팜파티가 열렸다. 기록도 세번째네…
수랏간 나인 팀은 좀 일찍 모였는데, 리더인 ㅈㅎ님이 전날밤 2시까지 재료 밑작업을 싹 다 해놓으신 덕에 일이 별로 없었다. 말린 호박과 가지, 무와 당근, 토란대와 버섯 등 6가지 나물에 비빔밥. 몇몇 나물은 청장(참치액젓+꽃게액젓+조선간장)으로 감칠맛을 냈는데, 필히 담에 저거 해봐야지. 고추장에 고춧가루, 매실청, 참기름으로 사과를 두 개나 갈아넣은 비빔장도 독보적이다.
가마솥에 장작불로 푹 끓인 된장배춧국도, 역시 사과 갈아넣어 깊은 단맛을 낸 겉절이도 어제 밭에서 뽑은 배추의 여러 버전. 도저히 참지 못하고 국을 2.5그릇 먹었다. 두그릇에 끝내려다, 막판에 가마솥에 남은 배춧국 들통에 붓는데 풍미에 넘어갔다. 이건 맛이 다르지.
소뿔농장 나들이는 농장의 맛에 푹 빠지는 것 외에 서로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다. 탁월한 혜신쌤이 이끌어주는 공감 마당이다. 마법의 마이크를 잡기만 하면 다들 차례로 사는 얘기를 털어놓는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 목표라는 ㅁㅅ님. 코알라 팬더 마냥 귀여우니까 살아남는 세상. 내 목표는 다정하고 유쾌하게 늙는거라 완전 공감했다.
ㅎ님은 인생에 몇년 없을 것만 같은 안정적 시기를 보내는 중이라고 했다.인생의 파도를 타는데 중급자는 된 것 같다고. 어려웠던 시기도 끝내 지나간다는게 진리지. 파도가 잦아지는게 아니라 파도 타는걸 평생 배우는구나.
76일 전 아내 지영을 보낸뒤 항상 지니고 있는 그녀 사진과 함께 한 ㅈㅈ님. 이제 아이가 그를 살리고 있다는 말씀이 남는다. 모든 것은 사라졌지만, 지영과 함께 해준 마음들은 기억하시겠다는 말도.
마음 나눈 이의 죽음 만큼 삶의 여정에서 강력한 경험이 있을까. 지영을 문득 떠올리며 요즘도 눈물 짓는다는 ㅁㅅ쌤도, 동네 이웃으로 그녀에게 반했었다는 ㅇㅈ님도, 지영에게 단호박죽과 직접 쓴 도토리묵은 그만 먹겠다는 말을 들은게 넘나 좋았다는 ㅈㅎ님도, 지영이 유기농 밥상을 즐기던 인사동 ‘꽃밥에 피다’ 대표님 추억까지 우리는 저마다 그녀를 그리워한다. 이런걸 나누는게 어떤 의미인가 하면…
혜신쌤은 슬픔을 슬퍼할 수 없는 것이 고통의 본질이라고 했다. 하여, 같이 마음껏 슬퍼할 수 있는 자리들이 필요하다고 했다.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괜찮지 않냐고 하는 건 좌절과 분노를 부를 뿐이지만, 그저 지금 각자의 마음을 나누는 건 우리 주변 공기를 바꾼다.
인생 꿀팁들도 이어졌다.
이제 직진의 삶을 살지 않는다는 ㅈㅇ님. 양평 오는 길, 단풍에 매혹되는 바람에 길을 잃고 직진만 한게 오늘 지각한 이유라고. 아무렴. 좀 늦어도 되고, 돌아와도 괜찮지.
남편이 성에 안찬다는 사주 풀이를 들었다는 ㅇ님. 이건 송중기 배우가 남편이라 해도 성이 안 찬다는 운명? 남편에게 불만이 있다한들 그건 남편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사주 탓이라는 깨달음이라니.
나쁜 인연을 떼어내는 용기도 인생의 복이란 얘기. 해방된 미녀들의 자유로운 이야기들도 편안하구나. 뭔가 나를 구원해주는 것을 늘 찾았는데, <당신이 옳다>는 세월이 흘러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뿌듯함을 얘기해준 ㅅㅈ님도 멋졌다.
대를 이어 여성들 돕는 일을 해오면서 얼마전 70주년을 기념한 비빌언덕 비덕님. 그동안 수고에 고맙다며 그녀들이 만들어준 작은 현금봉투로 요즘 맛난 거 귀하게 즐기는 작은 호사를 자랑하셨다. 나를 위한 선물같은 시간도 아이디어와 애티튜드가 필요하다.
일주일 전 <정부가 없다>는 책를 낸 작가로서, 10.29 이태원 참사 당시 이야기를 풀어내는게 여전히 내게 아프다는 것도, 뭐든 품어주는 이들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도 확인. 정부는 원래 무슨 일을 해야하는지 쫓아간 이야기의 마지막 장에서 다정한 연대를 떠들게 된 건 아마 소뿔 연대에서 학습한 영향도 분명 있을게다.
2300평 농장에서 70~80가지 작물을 유기농으로, 생명역동농업 방식으로 키우다보니 별별 사정이. 다 생기는 법. 150마리 닭도, 6마리의 개, 고양이 25마리도 살뜰하게 챙기면서 3년째 회원들 밥상 풍성하게 해주시는 미아 규섭 농부님. 이분들 수고에 세심하게 염려와 응원도 아끼지 않는 소뿔 회원 분들 보면, 다정이 전부인가 싶다.
그리고 저녁까지.
박고지김밥, 계란어묵김밥, 어묵꼬치, 기막힌 오징어무침 곁들인 충무김밥, 지글지글 갓 부친 전으로… 사진 찍을 겨를 없이 김밥 마는대로 사라졌다.
남은 음식은 싹싹 다 나눴다. 진짜 마무리까지 다정했다.
“상호 부축의 원리를 실전 무술로 익히는 가치 공동체”니까.
뽀너스 컷은, 찍사로서 뿌듯해서. 초상권 보호 대신.. 아마 모르시겠지?